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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에 대신하여

                 -소록도병원과 나가시마() 애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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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순천을 거쳐 녹동으로

 1995421일 아침, 필자는 전라남도 남단의 섬 소록도에 가기 위해 935분에 출발하는 서울발 여수행 특급열차에 몸을 실었다. 오후 225분에 순천역에 도착했으나 때마침 비.

 역 앞에서 순천 버스 터미널까지는 택시를 이용한다. 지난 번(321) 소록도를 찾았을 때는 부산에서 여수까지 고속버스를 이용하여 순천을 경유했으나(20분 간격으로 순천 경유 녹동행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이번에는 서울에서 기차로 순천까지 내려와 시외버스로 녹동을 향했다.

 전라남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버스 차창을 통해 바라보면서 2시간 반, 종점인 녹동에서 하차한다. 버스정류장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를 타고, 소록도와 마주보고 있는 녹동 선비치 호텔로 향한다. 호텔을 경영하고 있는 장복조()씨는 [소록회]라고 하는 소록도병원 직원들의 OB·OG회의 회장님. 사전에 서울의 유준(׳) 의과학(Ρ)연구소 이사장이며,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인 유준 박사에게 받은 소개장을 장씨에게 건네준다.

 최근에 세워진 멋진 호텔의 이층 온돌방으로 안내되었다. 500미터 건너편에 떠있는 고도(͵)가 여행의 목적지인 소록도이다.

 녹동()은 인구 2만을 넘는 항구도시로 올 봄부터는 제주도행 여객선도 정기적으로 취항하게 되었다 한다. 마을 어귀의 언덕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կ)에 저항하여 싸운 두 사람의 조상을 모신 사당이 있다. 그 언덕 바로 앞에 떠있는 소록도는 그 이름처럼 소록(작은 사슴)을 생각케 하는 섬으로, 왜 하필이면 여기가 나병의 섬, 한센병환자들의 강제격리의 섬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왔던가, 일순 불가사의한 마음조차 들었다.

 

 부산, 광주, 대구 3개소의 기독교 나()요양소가, 1909년부터 1913년에 걸쳐 각기 개설되면서 적은 인원수이긴 하나 조선의 한센병환자들이 수용되기 시작했다(광주요양소는 1927년에 여수로 이전). 한편 조선총독부는 [부령 제7](191622), 조선총독 테라우치(Ү)의 이름으로 [명치45년 조선총독부령 제106]의 조문을 개정하여 [전라남도 소록도]에 도립 자혜의원(ܻ)을 설치할 것을 공포({조선총독부 관보}1065)하고, 같은 해 710일 육군군의였던 아리카와()를 원장으로 취임시킨다. 그 이후, 29년간 5대에 걸쳐 일본인 의사가 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소록도는 한센병환자 격리시설의 섬으로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끝날 때(한국인에게는 해방)까지 계속된다. 일제시대의 조선총독부에 의한 [구라(ϭ)사업]의 실체가 무엇이며 [의료]라는 명목 하에 조선인 한센병환자들이 어떠한 지배와 박해를 받아왔는지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고 일념으로, 3월과 4, 나는 2번에 걸쳐 한국 전라남도 남단의 고도인 소록도병원을 방문한 것이다.

 421일 밤은 일제시대부터 소록도 요양소에서 약제사로 근무하고 있었던 장복조()(79)와 간호사로 근무했던 박덕엽()(70)가 호텔을 방문해 주어, 두 사람으로부터 당시의 소록도 요양소의 모습을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다음날의 통역도 장복조씨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녹동에서 소록도로

 다음날인 22일에는 전날 밤부터의 비도 그쳐, 사진촬영에는 절호의 날씨였다. 소록도에 아직도 남아있는 일제시대의 건물과 유적들을 촬영하는 것이 이번 방문의 주요 목적이다. 일본을 출발할 때부터 36장짜리 필름을 30여통 준비하여 조선에 남겨진 일제시대의 상흔을 촬영함으로서 일본이 행한 식민지 지배의 일단(Ӯ)을 명확히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필자가 숙박한 호텔로부터 걸어서 5분쯤 걸리는 곳에, 소록도행 페리승선장이 있다. 요금은 편도 300, 승선시간 10분 정도의 거리에 소록도가 있다. 장씨와 함께 승선했다. 배 안에서 섬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누군가 등을 두들긴다. 뒤돌아보니 전번 소록도를 방문했을 때 [소록도에는 왜 왔는가? 한국에는 언제 입국했으며, 언제 출국하는가? 이름은? 나이는?] 등등, 자세히도 조사하던 소록도 주재 경찰서장님이 웃으면서 서 있다. [한 달쯤 뒤에 다시 올 겁니다]라고 악수까지 하고 헤어진 탓인지, 이번에는 무척이나 정을 낸다.

 페리로 섬의 선착장에 도착하니, 국립 소록도병원의 김양빈(ޯ) 의사()계장이 승용차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둘째 날의 통역을 부탁한 김춘식()씨의 얼굴도 보인다. 전전날 서울의 유준(׳)박사가 필자의 방문을 소록도의 오대규(Х)병원장에게 전화로 알려둔 탓인지, 이번에는 섬으로 들어가기 위한 일체의 수속도 없이(미리 수속을 해 두었기 때문에) 김양빈 의사계장이 운전하는 승용차로 곧 바로 치료본관까지 갈 수가 있었다.

 소록도는 면적이 약 491만로 섬의 동쪽 부분(1/3)은 직원지대가, 서쪽 부분(2/3)은 환자지대가 차지하고 있으며, 원래는 두 지역 사이에 [경계선]이 있었고, 직원지대로부터 환자지대로 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으며 경계선에는 검문소가 있었다. 경계선에는 철조망이 처져 있었고 무장한 경비원들이 순찰을 돌았다고 한다. 지금은 [검문소] 대신에 [1안내소]가 있으나 필자를 태운 자동차는 그냥 통과했다. 녹동에서 섬으로의 선착장은 직원지대에 있으며 거기에는 [한센병은 낫는 병입니다. 안심하고 이 섬에서 치료합시다]라고 크게 검은 글자로 쓴 하얀 사각의 탑이 세워진 것이 인상적이었다. 길을 따라 교회당과 우체국의 건물도 보인다.

 5층 건물인 백악()의 치료본관은 토요일인 탓인지 환자들의 모습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는 20여명에 가까운 환자들이 1층 진찰실 앞의 대합실에서 진찰순서를 기다리고 있었고, 실명한 환자와 휠체어를 탄 노인들이 부첨인들과 함께 진찰실을 방문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의 한센병환자

 19943월에 발행된 국립소록도병원 {1993년 연보}를 참고하여, 한국의 한센병환자 현황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숫자는 199312월말 현재의 것이다.

 {연보}에 의하면 전국의 한센병환자수는 추정 5만명, 등록관리환자는 22,310명이며, 그 중에 [재가(ʫ)환자]11,672명으로 52.3%를 차지한다. 그 내역은 보건소 치료가 전체의 29.2%, 한센병기관 외래치료가 23.1%로 되어 있다.

 정착농원이 전국에 97개소 있으며 등록관리환자의 37.7%(7,963)가 정착농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보호치료자]12.0%6개소의 민간수용시설에 1,453(6.5%)이 수용되어 있으며, 소록도병원의 입소자는 1,322명으로 전체 환자의 5.5%에 불과하다.

 경기도 수원시 교외에 [대한 나관리협회 나병연구원]이 있으며, 고영훈()원장을 올해 들어 2번째로 방문했을 때, 많은 재가환자들이 외래치료환자로서의 진찰을 받고 있었다.

 한편, 일본의 한센병 입소자의 경우는 199412월말 현재 13개소의 국립요양소와 2개소의 사립요양원에 입소해 있으며, [보호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의 수가 5,826명으로 한국보다 훨씬 많아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환자의 격리를 전제로 한 [나예방법](법률 제214, 1953815일 시행)이 거의 사문화되었다고는 하지만, 필자가 소록도를 방문한 당시에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199641일에 비로소 폐지되었다). 이에 비해 한국의 경우는, 식민지 통치하의 1935420, 제령 제4호로 [조선나예방령]이 공포되고, 동년 61일에 [조선나예방령] [조선총독부령 제62호 조선나예방령 시행규칙]이 동시에 시행되었다. 그 후, [나예방령]은 해방 후에도 한동안 존치되었으나 19542월국회에서 폐기되고, 그 대신에 [전염병예방법]이 제정됨으로서 한센병은 일반법의 규제를 받는 위치를 부여받게 되었다.

 더구나 일찍이 1961년부터 [정착농원]사업이 시작되면서 한센병환자, 회복자에 대한 격리주의가 재가(ʫ)치료로 전환된 것은 한센병환자에 대한 양국 간의 치료와 대응자세의 차이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 통계에 의하면 199312월말 현재, 한국의 양성 한센병환자수는 1,103명으로, 양성율은 4.9%, 100명 중 95명 이상은 나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치료본관 2층의 응접실에서 안()의료부장과 김()의사계장을 만났다.

 필자는 당시 병원에서 편찬 중이던 {소록도병원 80년사}에 도움이 될만한 자료들을 일본에서 수집하여 병원 측에 제공하였고, 그 대신에 소록도에서의 자유로운 사진촬영허가와 편의를 부탁했다. 안 의료부장은 부탁을 기분 좋게 승낙해주었고, 덕택에 사흘 간이나 섬에 체재하면서 700장이나 되는 사진을 자유롭게 찍을 수가 있었다.

 [어디부터 돌아보겠습니까?]라는 김 의사계장의 말에, 우선 1916년에 설립된 당시의 [구자혜의원(ܻ)]의 요양소와 검문소, 그리고 가까운 [남지구 병동]을 방문하기로 했다.

 우방협회가 펴낸 {조선의 구라사업과 소록도갱생원}(1967)에 게재된 [소록도갱생원 전도]라는 1940년대의 소록도를 나타낸 그림지도를 활용하여 조사키로 했다

 ()자혜의원의 시설로는 섬 서쪽 고지에 진료소 건물이 남아 있을 뿐, 요양시설들은 수풀 속의 폐허로 변해버려 붉은 벽돌만이 산재한다. 창설당시인 초대 아리카와()원장, 2대 하나이()원장 시대의 진료소는 목조 단층건물로, 실내는 대합실과 진료실로 나누어져 있으며, 검은 기와와 검은 판자벽으로 이루어진 단정한 건물이다. 건물정면의 지붕도 옛날의 기와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병원 정문 앞의 부속건물도 지붕이 풀에 뒤덮힌 채 폐허로 남아 있다.

 

[보리피리]와 파랑새

 필자가 문둥이 시인 한하운(, 1919-75)을 처음 알게된 것은 19953, 처음 소록도를 방문했을 때였다. 일제 식민통치하의 조선의 [구라사업(ϭ)] 실태를 알아보려고 소록도를 찾았을 때, 섬 중앙에 있는 공원 남측의 나즈막한 언덕에 서 있는 [개원40주년 기념비] 앞에서 다다미 석 장 정도의 평평한 돌에 글씨를 새긴 시비()를 발견했다

 돌비석에는 [시인 한하운]이라는 음각과 함께 [보리피리]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19734월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리피리]란 시는 한국의 국정 교과서에도 실려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애창되고 있다고 안내직원이 설명해 준다.

 국립소록도병원의 치료본관은 당당한 백악의 5층 건물이다. 그 건물 앞뜰에는 [개원 50주년기념, 1966517일 건립]이라고 쓰여진 석비()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에는 [아으 50(Ҵ)]이라는 제목의 한하운의 시가 새겨져 있다.

 

 천형 섬에는

 납골당이 확답

 

 끝내 [나병이 낫는다]는 신화가

 우악한 산하에도 불어오는가.

 

 모질게 살아온 목숨들이

 이제 뭍으로 신천지를 찾는

 

 찬란한 슬픔의 소록도.

 아으, 50.

 

 해방.

 자유가 있는

 . 새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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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에서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한하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하운의 시를 노래한 CD나 테이프를 구해 보려고 서울거리의 레코드점을 몇 집 방문하여 점원에게 물어보았다.

 [한하운의 테이프 없습니까?][보리피리라는 노래의 CD는 없습니까?] 종이에다 [한하운, 보리피리]라고 한글로 써서 그것을 점원들에게 보여주면서 찾아다니던 중, 한 가게에서 여자점원이 필자가 가지고 있던 종이를 보고 CD코너를 찾아보더니 한 장의 CD를 가져 왔다.

 [한국서정가요 베스트]라고 한글과 영어로 쓰여진 CD판의 19곡 중에 한글로 보리피리라고 쓰고 영역()을 첨가한 곡이 하나 들어 있었다.

 서울의 대규모 서점들은 종로 1가에서 2가에 걸쳐 모여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교보문고, 영풍문고, 종로서적이 있고, 각기 대량의 다종다양한 서적들이 점두()를 메우고 있다. 영풍문고 지하에도 CD와 비디오를 파는 넓은 판매코너가 있다. 필자는 거기서도 [한하운의 CD가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았다.

 점원이 찾아준 것은 정복주()라는 소프라노 가수가 부른 [한국예술가곡집]이라는 제목의 CD판으로, 수록된 열여덟 곡 중에 한하운이 작시한 [파랑새]가 끼어 있었다.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불과 226초의 짧은 가곡이지만 아름다운 시어와 운율과 함께, 짜내는 듯한 문둥이의 애달프고도 슬픈 감정이 전해져 와 가슴을 찌른다.

 한하운에 관한 서적들을 있는 데로 구입하려고, 세 군데 서점의 판매카운터에 그 재고를 물어보았다. 컴퓨터로 검색한 한하운에 관한 서적은 다음과 같다.

  한하운 저 {보리피리} 미래사(1991, 170)

                            (한하운의 시 74편과 해설, 연보, 문헌을 수록). 

  한하운 저 {파랑새·보리피리} 상아사(1993, 161)

            (74편과 한하운의 [나의 인생편력], 해설 [한하운의 생애]를 수록)

  한하운 저 {나의 슬픈 반생기} 도서출판문학예술(1993, 484)

  김창직 편저 {가도가도 황토길·한하운그 슬픈 생애와 시} 지문사(1982, 392)

 

 귀국하고 나서도 한하운이란 이름이 필자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하운에 관한 연구물이나 출판물이 없을까 하고 찾아보던 중) 최석의() [문둥이 시인 한하운]({종성통신()}188, 1995)이 있다.

, 와코() 미스즈씨가 번역한 [보리피리] {무궁화 통신}83(19843)에 실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와코()씨의 논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어린 시절, 풀잎을 입술에 대고 소리내 불었던 추억을 가지고 있는가. 인공의 피리와는 전혀 다른 불가사의한 음색을 가진다. [보리피리]라는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왠지 그런 생각이 들어 아무런 의심 없이 망향, 추억의 노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릴리리]라고 되풀이되는 애절한 가락 속에, 보다 처절한 바램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작사자 한하운이 한센병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였다]

 

 그리고 오선지에다 작곡가 조념(ҷ)의 곡과 함께 [보리피리]의 시를 적고 있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릴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릴 때 그리워

 -릴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릴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ߣ)

 눈물의 언덕을

 -릴리리

 

 두 번째의 소록도 방문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6월 하순, 한센병 역사연구에 관해 사숙하고 있던 최석의()) 최석의() [기행·소록도로의 여행]이 잡지 {타마(ب)} 19945월호, 7-14쪽에 게재되어 있다.

 선생으로부터, 직접 쓰신 시론인 [문둥이시인 한하운({종성통신}19956)]을 받았다. 한하운이 쓴 4편의 시에 대한 훌륭한 시역()와 해설이었다.

 그 해설의 한 부분에 [유감스러운 일이나 일본에는 한하운의 시가 그다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본인이 알고 있는 한 {한국현대시집}(토요미술사 간행)과 강정중(˩)이 번역한 [보리피리] 한 편이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본인은 무릇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빼어난 시에는 국경이 없으며 공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쓰고 있다.

 한글을 거의 읽지 못하는 필자로서는, 누군가 [한하운시 전집]을 번역해 주지나 않을까라는 생각만 깊어갈 따름이었다.

 19951020일 저녁, [나시인집단(ӥ)]을 주재하고 있던 시마다 히토시()씨가 나가시마() 애생원()에서 69세의 생애를 마쳤다. 췌장암을 앓고 있던 시마다씨는 병실에 문안을 간 필자에게 [내가 모아둔 자료를 이용해서 식민지하의 조선 한센병환자의 실태를 규명해 주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기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어느 초겨울, 시마다씨의 후견인이자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우사미 오사무(ڸ)) 우사미 오사무(ڸ)(1926년생) [나예방법] 국가배상 세도나이(Ү)소송의 나가시마 원고단장. 시마다 등의 후견인이었다. 19494월에 나가시마 애생원 입소

씨와 함께, 돌아가신 시마다씨의 서고를 방문했다. 병동 뒷마당에 있는 간소한 조립식 건물의 서고에는, 서적과 테이프, 본인의 육필기록, 봉투에 정리된 수많은 각종 자료들이 책꽂이에 수납되어 있었다. 봉투의 내용을 하나하나 조사하다 보니, 큰 봉투 속에 30여권의 [나시인집단] 발행의 {()}지가 있었다. 같은 호수가 중복된 경우도 있었고 누락된 호수도 많았다.

 {()}지가 들어 있는 봉투에는 원고도 들어 있었다. 그 원고를 보는 순간, 놀라움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로 한하운의 시집 {보리피리}를 번역한 원고가 아닌가.

 맨 첫 장에 [한하운·보리피리]라고 쓴 다음, 원고지의 칸을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메워간 펜글씨. 그리고 여기저기 약간 날려 쓴 글씨로 고쳐놓은 붉은 펜글씨들. 김창직의 [해설]도 일본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지 제24(19794)와 제25(19802)에는 한하운의 시집인 {보리피리}의 번역문이 [강순(˩) 감수, 나카하라 마코토()] 번역으로, 2호에 걸쳐 분할되어 게재되어 있었다. 우사미씨에게 물으니, 나카하라씨는 오래 된 입원환자로, 불어에 정통하며 한국어도 읽을 수가 있는 분이라고 했다.

 {보리피리}의 역시()는 총 54편으로, 한하운의 유고시가 누락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면 19555월에 출판된 제2시집 {보리피리}의 초판본에 가까운 형태의 시집이며, 한하운이 사거()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19752월에 한하운이 사망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출판된 {보리피리}를 텍스트로 번역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쨌든 {()}지 제24호는 19794월 발행으로, 지금부터 벌써 20여년 전에 한하운의 시집 {보리피리}, 같은 한센병 환자인 이웃나라의 시마다씨, 나카하라씨에 의해 세상에 소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감동적이었고 필자에게는 충격적이기도 하였다.

 번역자인 나카하라씨를 만나 {보리피리}의 번역 경위와 [나시인집단]의 주재자인 시마다씨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었다.

 해가 바뀐 뒤 필자는 나가시마 애생원을 방문하여, 19일 오후에 나카하라씨와 만날 수가 있었다. 나카하라씨는 {보리피리} 번역의 경위뿐만 아니라 텍스트로 쓰인 {보리피리}의 원본도 보여 주셨다. 이하 {()}지 제24호에 게재되어 있는 시마다 히토시() [{보리피리}의 번역과 한하운의 시에 관해서]라는 글, 그리고 나카하라씨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하여, 어떠한 경위를 거쳐 문둥이 시인·한하운의 시집 {보리피리}가 시마다씨가 편집, 발행하는 {()}에 게재되게 된 것인지를 정리해 보기로 하자.

 한하운의 시집 {보리피리}는 나라(ү)에 있는 나환자시설인 [매듭의 집(હӪʫ)]의 이이카와()씨로부터, 한국여행 기념으로 고(ͺ) 시마다씨가 선물 받은 것이었다.

 텍스트로 사용된 {보리피리}19751012일 초판의 삼중사(߲,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자동)발행의 것으로, 지질이 좋지 못한 문고판의 소책자이다. 75228일에 한하운이 사거한 다음, 같은 해 가을에 출판된 것으로, 시마다씨가 이이카와씨로부터 건네 받은 것은, 2년 뒤인 1977년이다.

 시마다씨는 이 시집으로 인하여 같은 병을 가진 시인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작품내용에 관해서도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한글을 읽을 수가 없어 고민하던 중, 마침 애생원 에서 조선어 학습회가 있었고, 거기에 참가하고 있던 나카하라씨에게 그 시집을 건네 주게 되었다고 한다. [번역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등의 말은 일체 없었고, 시마다씨는 그냥 시집 {보리피리}를 놓고 갔을 뿐]이라고 나카하라씨는 말한다. 설사 그런 생각이 있더라도, [번역해 보는 게 어떠냐]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 시마다씨다운 행동이다. 시마다씨는 {()}지 제24호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본 나요양소에는 수 백명의 한국, 조선 출신자들이 있으며, 그 중에는 시를 쓰는  이들도 몇 사람 있으나, 고국에서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문필활동이나 그 작품에 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으며,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보리피리}의 번역과 한하운의 시에 관해서]에서)

 

 나카하라씨는 시집 {보리피리}에 수록된 모든 시를 번역했으나, 번역한 내용에 자신이 없어 누군가 신뢰할 만한 사람의 감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시마다씨에게 그런 생각을 전하자, 미리 그런 점을 예견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쿠류우() 낙천원()(군마현 쿠사츠(ة))에서 시()를 지도하게 계시던 무라마츠()씨를 통해서 즉각 강순(˩)씨의 감수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무라마츠, 강순씨는 이미 고인).

 강 순씨는 {현대한국시선}(이화서방)의 역자이며, 한하운의 시도 일부이기는 하지만 번역한 바 있다. 시집 {보리피리}는 이러한 경위를 거쳐 [강순 감수, 나카하라 마코토 번역]의 형태로 나 시인집단 {()}지에 게재된 것이다.

 나카하라씨의 기억에 의하면 번역한 원고용지는 그 후 어떻게 된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으나, 주필()을 넣은 것은 강순 선생이 분명하며, 김창직의 [해설]도 번역되었으나 활자화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잊혀진 한하운의 시집]이 일본에서 다시 한번 빛을 보도록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램이다.

 

한하운의 생애와 시

 문둥이 시인 한하운은 1919224, 조선 북부의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한태영()으로 아버지 한종규(Х)와 관서(ΰ)라는 이름의 모친 사이의 2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쪽의 가계는 3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한 학자의 집안이었고, 어머니는 함남 부호의 외동딸로 관서가 17살 때 12살인 종규와 결혼했다.

 당시의 조선 풍습으로는 어린 남자와 손윗 여자의 이러한 결혼은 극히 일상적인 일이었다.

 한하운이 태어난 1919년은, 동년 31일을 기점으로 조선근대사상 최대의 반일 독립운동인 [3.1독립운동]이 일어난 해이다. 토착 부호이던 아버지 한종규도 3.1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을 당했다. 함주()라면 함경남도의 각 군 중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다.

 한하운이 태어난 동천면()은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1930년의 국세조사의 [직업(대분류)별 본업인구]통계표에 의하면, 직업을 가진 4,194명 중 농업종업자가 3,472(남자 3,378, 여자 94)으로 전체의 82·8%를 차지하고 있어, 함경남도의 농업종업자 평균비율인 69.9%보다 무려 13%나 높다. 한하운의 집은 그러한 지역의 토착부호였다.

 하운이 7살 나던 해, 가족은 하운의 학업을 위해 함남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인 함흥으로 이사를 하게 되며 거기서 하운은 함경제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다.

 하운이 14살 나던 1933년 봄, 원인불명으로 몸이 무겁게 붓기 시작한다. 1936, 전라북도의 공립 이리농림학교 축산과를 졸업하게 되는데 재학 중에는 육상 장거리선수로 활동했다.

 한편, 번역소설에 몰두하여 3학년 때는 소설습작을 쓰기도 했고, 여동생의 친구인 R이라는 여학생과 교제하여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단편인 [어머니] [두견새] {조광()} {삼천리}에 투고한 적도 있었지만 연락은 없었다.

 1936년 중학 5학년 때, 당시의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 서울대의대 부속병원)에서 처음으로 [나병]이라는 확정진단을 받는다. 1939, 일본으로 건너간 한하운은 20살 나던 해 토오쿄() 세이케이() 고등학교를 수료했으며, 2학년 재학 중에 연인이 토오쿄로 찾아와 그의 인생 중에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내기도 한다. 한하운의 시가 키타하라 하쿠슈()나 이시카와 타쿠보쿠()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이 시기에 두 사람의 시에 접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9421, 중국 국립북경대학 농학원 축산학계를 졸업하고 [조선축산사]라는 논문을 쓴다. 당시 북경 협화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S라는 2세 여성과 교류하여, 두 사람의 여성, 이리농림학교 시절부터의 R과 북경에서 새롭게 교류를 시작한 S사이에서 갈등하던 시절도 있었다. S는 결국 한하운의 [나병]을 비관하여 자살하고 만다.

 1943년에 고향으로 돌아간 뒤 부친의 뜻에 따라 함남도청 축산과에 취직, 며칠 후에 장진군()으로 전근된 이후에는 주로 면양()연구와 개마고원의 개간에 몰두한다. 1944년에는 경기도청 축산과에 근무, 하이칼라 두발령에 저항, 거부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발병이 외부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치료를 개시했으며, 본명인 한태영을 한하운()으로 개명한다.

 19458, 조선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다. 조선 북부에 소련군정이 시작되면서 소유가산을 공산당에 몰수당하고, 남동생과 함께 노점 책방을 시작한다. 다음해인 19463, [함흥학생의거사건]으로 소련군에 의해 체포, 함흥형무소에 수감된다.

 한하운은 후에 이 사건에 바치는 시를 시집 {보리피리}에 발표하고 있다.

 

 [데모]

  - 함흥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1946. 3.13) 

 

  뛰어들고 싶어라

  뛰어들고 싶어라.

 

  풍덩실 저 강물 속으로

  물구비 파도 소리와 함께

  만세소리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

 

  모두들 성한 사람들 저이끼리만

  아우성 소리 바닷소리.

 

  아 바다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

 

  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

 

 19475, 하운의 남동생이 주도한 [북괴전복의거]에 연좌되어 다시 체포, 원산형무소로 이감된다. 그 해 여름, 모친인 관서(ΰ) 사망하며, 한하운은 원산형무소를 탈옥, 삼팔선을 넘어 남하한 뒤 전국각지를 유랑한다. 유랑 끝에 다시 귀향하지만, 남동생도 연인 R도 모두 체포된 뒤로 행방불명. 1948년에 다시 월남한다.

 

 19494, 서른 살 때에 {신천지} 4월호에 [전라도 길] 13편의 시를 모은 [한하운 시초()]로 문단에 데뷔, 5월에는 정음사에서 {한하운 시초}를 발행한다.

 

 서점 앞에는 길이 한자 반, 폭 여섯 치의 새빨간 바탕의 종이에 {한하운 시초}라고 희게 인쇄한 광고가 5월의 바람에 나부끼는데, 봄바람 부는 거리에 깡통을 쥐고 다니는 나의 모습이란 처량하기 한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중략) 이 부끄러운 거지생활 말고는 어쩔 수가 없는 운명이지 않은가그리고 나 자신 시인이라 자칭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 이 거리에서 거지로서, 인간으로서의 자부심도 없이 짐승보다도 천한 저주와 학대를 받으며, 목숨만을 부지하려 했다.

 시가 나의 현실생활에서 밥도 죽도 되지 않는, 냉수보다도 도움이 못되지만, 정신면에서는 시는, 버릴 수 없는 제2의 생명이다. 이 시로 사는 길이 전 생명을 지배하고 소망을 잃어버린 어두운 나에게 백광()같은 빛을 마련해 주고, 용기와 의지의 청조()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한하운 {나의 인생편력})

 

 19498, 한하운은 경기도 수원시 세유동의 한센병환자 정착마을인 하천()부락에 들어간다. 같은 해 12월말, 70명의 환자를 인솔하여 경기도 부평으로 가서 새로운 한센병환자 수용마을을 설립, 600명의 환자들에 의한 선거에서 자치회장에 취임한 뒤, 원명을 [성혜원(]이라고 명명한다. 19548월에는 [대한 한센총연맹]을 결성하여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발간된 {한하운시초}가 불온하다고 하는 이유로 4개월간 국회와 신문·방송에서 논란이 된 적도 있었으나, 19555, 두 번째 시집인 {보리피리}를 인간사()에서 출판한다.

 그 중에 수록되어 있는 시 한편을 소개한다.

 

 [전라도 길]

     -소록도로 가는 길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한하운의 관심은 문학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쳤으며, 활동도 한센병 환자운동, 교육, 사회사업에까지 미쳤다. 한센병 환자의 어린이들을 수용, 양육, 교육하는 보육원으로 19515월에 [신명보육원]을 설립하여 원장에 취임했고, 1960년에는 [청운보육원]을 이양 받아 원장으로 취임하여, 2개의 보육원을 오가며 어린이들을 보살폈다. 19629월에는 나이가 든 고아들을 위한 정착사업소인 [안평농장]을 경기도 안성에 창설하여 농장장으로 일하는 한편, 19632월에는 가축개량사업으로 부평에 [경인종축장]을 창설하여 장장()으로 취임하고 있다. 또 신안농업기술학장, 197111월에는 한국카톨릭 사회복귀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그의 일생은 실로 다사다망했다. 한하운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몸만 건강했더라면 정치나 경제방면에 투신했을 것이다]라고.

 19675, 간경화증 발병. 19748월 월간 [새빛]사가 주최한 고(ͺ) 육영수 여사 추도회에서 [() 육여사 영전에]라는 추모사를 낭독했으나, 공식석상에의 참석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육영수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으로 [구라사업]에 열심이었다.

 1975228일 오전 1045, 인천시 북구 십정동 자택에서 사망. 사망한 뒤에 천주교에 귀의()했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군 김포면 장릉묘원에 있다. 한하운의 시집 {보리피리}에서 2편의 시를 골라 소개한다.

 

 [생명의 노래]

 

 지나간 것도 아름답다 

 이제 문둥이 삶도 아름답다

 또 오려는 문드러짐도 아름답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고

 꽃같이 서러워라

 

 한 세상

 한 세월

 살고 살면서

 난 보람

 아라리

 꿈이라 하오리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시마다 히토시()씨는 한하운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하운의 시에서 우리들이 우선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차이점보다 공통되는 것들의 크기이다. 생물학적으로 억제할 수 없는 자기질병관, 인간관계에 있어특히 비나병환자에 대한 자기설정, 자기혐오라기보다 자기말살적인 충동의 격렬함 등, 이러한 것들은 해석이 필요없이 공명(ٰ)되는 것이다. 아마도 환자로서 처해진 사회적, 역사적 상황의 공통성이 그처럼 근원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작가의 연보(Ҵ)를 보면 나병 회복자로서 사회에 복귀하여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대고 있으나 {보리피리}의 작품에서 보는 한, 그러한 모멘트는 작품상의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진정한 회복자의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런 점에서 나병을 둘러싼 역사의 중압감의 공유를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치유할 수 없는 병그것은 우리들이 인류의 과제를 근심하는 한 여전히 현실이다. 아직은 우리들 역시 한하운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회복자로서의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격렬한 자기부정이라는 형태로 밖에 자기실현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인간의 존엄이, 그 인간의 생존이라는 사실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들은 아직도 가혹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나시인집단 {()}24, 19794, p.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