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격리정책의 전개

 

--------------------------------------------------------------------------

1.조선총독부 [()]정책 규명의 시점()

--------------------------------------------------------------------------

 1994년 초가을, 필자는 [재단법인 우방협회]의 자료를 열람하기 위해 토오쿄() 메지로()에 있는 학습원대학 동양문화연구소를 방문했다. 재단법인 우방협회()1950년 가을, () 조선총독부 식산과장 호즈미(׿)의 제창에 의해, 일본에 의한 조선통치의 자료보존을 위해, 그 관계문헌자료의 조사, 수집 및 보존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수집된 자료 약 5,700점은 현재, 동 연구소에 위탁, 보관되어 있다. 재조() 일본인의 조선통치 역사를 조사하기 위해 학습원대학 동양문화연구소에서 {[우방협회·중앙일한협회]문고자료목록}(1985년 발행)을 뒤적이고 있던 필자는 우방시리즈 제9호로 발간된 하기와라(߲) {조선의 구라사업과 소록도갱생원}(196710월 발행)이라는 책자를 발견했다.

 50쪽 정도의 책자이다. 동양문화연구소 직원에게 부탁하여, 책자를 서고에서 가지고 나와서 열람할 수가 있었다. 그 책자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본제() [조선의 구라사업과 소록도갱생원]은 그 인간애와 규모의 웅대함에 있어 세계의 이목을 끈, 조선 통치의 본질을 표징하는 선정()으로 찬사를 받은 총독정치의 자랑스러운 유업이다.

 

 그리고 이 책자는 소록도갱생원의 설립 및 운영에 직접 관여한 요시오카(˪)(당시 전라남도 위생과장), 사이토()(당시 전라남도 재무부장), 요시자키(ӹڸ)(당시 갱생원 서무과장)의 세 사람이 집필하고, [조선의 구라사업에 대하여]를 하기와라(߲)(함경남도지사 등을 역임)가 기술하고 있다.

 이 책자를 보고, 소록도갱생원을 방문하여 나 자신의 눈을 통해 조선총독부 하의 조선인 한센병환자의 생활과 의료실태를 알아보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953월과 4, 두 차례에 거쳐 전라남도 남단의 국립소록도병원을 방문했다. 소록도를 견문한 내용은 오오사카() 인권역사자료관(현 오오사카 인권박물관)의 기관지인 {계간 리버티} 11(19959월 간행) [한국의 한센병의 섬·소록도를 방문하여또 하나의 식민지 지배]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소록도에서 필자가 본 것은 조선인 한센병환자에 대한 일본 통치자들의 잔학성과 비인간적인 시책과 행위들이었으며, 치유하기 어려운 식민지지배의 손톱자국이었다. 소록도로 강제격리 수용된 6,000명이 넘는 한센병환자에 있어, 박살(߯)과 굶주림, 그리고 처벌로서의 단종(정관절제)수술은 일상화되어 있었다. 필자는 일제통치하의 소록도 []요양소에 격리수용된 희생자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필자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자민족·자국민 중심의식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1998731, 쿠마모토() 지방재판소를 상대로, 13명이 [나예방법] 인권침해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제소한 이래, 2년 사이에 쿠마모토 지방재판소에 434, 토오쿄() 지방재판소에 93, 오카야마(˪ߣ) 지방재판소에 22명 등, 원고수가 전국 합쳐서 549명으로 불어나고 있다(2000620일 현재). 필자도 작년 가을부터 미력하나마 이들 원고들을 지원하기 위해, 국가의 한센병 정책의 잘못을 시사하는 자료 및 소논문 등을 출판하고 있으며, 쿠마모토 지방재판소와 오카야마 지방재판소의 재판 방청을 계속하고 있다. 이에 즈음하여 상기되는 것은 1997129일 오전10, 소록도병원 장애자병동의 일실에서 본, 한 노인의 사타구니에 남아있던 참혹한 단종의 상처자국이다.

 필자가 바젝토미(vasectomy)의 상흔을 처음 본 것은, 한국 전라남도의 남단에 있는 국립 소록도병원을 방문했을 때이다. TBS(토오쿄 방송)의 츠쿠시 테츠야()가 진행하는 [뉴스23]의 특별프로그램 [또 하나의 강제불임한국·식민지에서의 강제단종]의 취재협력을 위해, 국립소록도병원을 방문하여 일제시대에 [단종]수술을 받은 사람들을 찾았을 때였다.

 TBS의 카메라맨과 디렉터들을 방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통역을 담당한 이씨와 단둘이서 장애자병동의 당시 70세의 노인의 방을 방문하여, 취재를 위해 예정된 방으로 데리고 갔을 때의 일이다. 노인은 완전히 실명(٥)한 상태였으나, 방에 들어가자마자 바지와 팬티를 벗어 던지고 사타구니 사이의 단종 흔적을 일본인인 필자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피부가 놀랄만큼 새하얀 것이 인상적이었다. 음낭 뒤쪽에 옆으로 2,3센티 정도의 추한 상처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의사가 수술대에서 정식으로 메스를 사용하여 집도()한 상처자국이 아니었다. 한 순간의 일이었기 때문에 필자는 망연자실한 가운데 그것을 보았다. 통역의 이씨를 통하여 노인에게 바지를 입도록 부탁했다.

 그 뒤, TBS의 카메라맨과 디렉터를 방으로 들어오게 하여 인터뷰와 촬영이 진행되었지만, 필자는 단지 그 노인의 손을 꼭 쥐고 있을 뿐이었다. 그 장면의 일부는 TBS계통의 TV국을 통해, 19971222일 밤, 일본 전국에 방영되었다.

 노인은 열 세살 나던 때에 무단으로 나무의 잔가지를 꺾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처벌로써 단종수술을 받았다. 이하는 동년 129일 오전102분부터 1020분까지 소록도에서 행해진 인터뷰의 일부이다(본서의 [보고()1]에 그 전문을 게재했다).

-

 저는 단종수술을 1941년에 받았습니다만, 단종은 41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입니다.    그리고 사토()원장(수석간호장-필자) 때에는 참기 어려운 굶주림과 중노동, 그리고 가혹한 취급이 심했기 때문에 탈주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탈주하다 붙잡히면 무조건 단종수술입니다. , 그 외에도 원내에서 반일()적이거나 반항적이라고 찍히게 되면 단종입니다. 그리고 원내에서 물건이 없어지는 등의 사건이 일어나도 단종입니다. 단종이라는 것이 시작되면서 소록도에서는 남녀관계가 있었다거나 할 경우에는 무조건 단종수술이 가해지게 되었습니다. 왜 단종수술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독일에서 나환자 등에게 그것을 행하는 법률이 있었잖아요. 따라서 일본정부도 [나환자들은 전혀 치유될 가망성이 없다. 아기를 낳더라도 까마귀 새끼는 까마귀이고 승냥이 새끼는 승냥이일 뿐이다]라는 생각에서, 환자들은 아기를 가질 수 없도록 해 버린 겁니다. 단종이란 정말로 잔혹한 방법입니다. 정말 뭐라고 입으로 말할 수가 없어요. 시대의 잘못이라고 하지만.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고 억울해서. 내 나라, 한국이라는 모국 땅에서 도대체 왜 그런 지독한 꼴을 당해야 했는지.

 한센병환자도 세계 곳곳에서 다들 잘 살고 있으며, 환자들의 아들딸들도 [한센병]에 걸리지 않은 채 건강하게 자라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아이를 만들 수 있는 몸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어요. 아이를 낳을 수 없는데 대마도를 내게 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나이가 되어 이런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만일에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벌써 자살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병에 걸려, 그런 수술까지 당한 환자들은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벌써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입소하여 환자들 중에서는 젊은 편이었기에 지금까지 살아 있지만 단종의 경위는 대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일제통치하의 소록도 갱생원에서는 19364, 종래의 부부환자 별거규칙을 고쳐 [일본본토와 마찬가지로] 부부동거를 허가했지만, 그 조건으로서 남성환자의 정관절제수술(단종)을 행하게 된다. 소록도갱생원 {1941년 연보}에 의하면 1940년 말 현재의 부부동거자가 840쌍에 달하고 있다(이 사실은 199737일부 {마이니찌()신문}에 보도되었다).

 환자의 [단종]은 직원에게 반항하는 자나 도망자 등에 대한 처벌로서도 행해졌다. 소록도에는 일제시대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감금실와 형무소 건물들이 남아 있고, 감금실 건물에 인접하여 [해부실과 유체안치실]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유체안치실에는 [단종대]가 놓여 있다. 노인은 열 세살 나이의 소년시절, 간호수의 집도()에 의한 처벌로서의 [단종]을 당한 것이다.

 

 지금부터 6년 전인 1994, 필자는 두툼한 {조선총독부 관보} 142(서울, 아세아문화사)을 들치면서 10만명에 달하는 일제식민지 지배하의 조선에서의 [행려사망자]라고 쓰여진 기재란을, 귀적(С)이라도 들여다보는 기분으로 조사하고 있었다. 조사한 1916, 28, 33, 38, 40, 44년의 단 6년 사이에만 240명이 [, 나환자]로 행정에 의해 {관보}에 기재되어 있었다. 240명의 [, 나환자] 사망자의 기재개소를 복사하여 한 장, 한 장 오려내 종이에 붙이면서, 마치 [위패]를 세우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일본각지의 한센병요양소에는 납골당이 세워져 있다. 소록도갱생원에도 거대한 납골당이 세워져 섬에서는 만령당(속칭 한록당())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 속에는 나환자들의 유골이 모셔진 자그마한 유골항아리와 나무상자(한국의 경우)가 안치되어, 이름과 사망년월 등이 씌어져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려있는, 각지에서 가매장된 행려사망자 중의 나환자들은 여전히 가매장 상태로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말하는 [행려사망자], [길 가다가 쓰러져 죽은 사망자로 인수자가 없는 사람]에 국한된 것으로, 물론 총독부의 헌병, 경찰 등의 행정이 파악한 범위내의 것을 말한다. 일제식민지 지배하의 조선에서 부랑, 걸식하거나 혹은 인신매매되어 창기와 작부 등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이 다수 출현하게 되는 사회적인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강만길(˩ز)이 쓴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창작사 1987) 등에는, 그러한 빈민으로 몰락한 사람들의 생활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러한 생활의 궁핍이 일제식민지하의 조선인 한센병 발병자를 격증시켰다. 나환자의 [행려사망자]의 기재숫자는, 조사한 6년 간에 240명이었으며, 그 중에 [아사(), 영양불량, 동사(), 자살]84(34.6%)에 미치고 있다. 필자는 역사연구의 논문을 쓴다는 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여, 행려사망자의 사인()을 유형화하여 수치화한 사실에 대해 뒤가 켕기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실은 한사람 한사람의 죽음의 의미를 {관보}의 기록을 통하여 재해석, 재음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일제식민지 지배하의 조선인 나환자]와 소록도에 관해서 상당히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역사나 사회과학의 연구, 또는 교육의 장에서의 과제로 삼으려 하지 않았으며, [일본군 성노예(위안부)]문제의 경우처럼 그것을 일제의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의 책임으로서 심각하게 취급하지도 못했다. 그 점, 한 사람의 연구자, 한 사람의 교육자로서 필자의 [전쟁책임]은 면하지 어려우며, 피해를 입은 조선인들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건차()씨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것은 필자의 [자민족 중심주의] [아시아(조선)에 대한 인식의 빈약함] 등으로부터 오는 결과이다. [정치주의적], [사회운동적]인 시점에 지나치게 치우쳐, 가혹한 삶을 강요당하고 비인간적으로 취급받아온 조선인 한센병환자 그 자체를 무시() 혹은 경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라고 반성하고 있다.

 1999년 가을부터 한센병 국가배상 청구공판의 일개 지원자로서 관계해 왔지만, 이러한 생각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본서에서는 [][나환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자료인용에도 [][나환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한센병]으로 고쳐 쓰지 않은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라는 말에 포함된 의미의 가혹함, [불치의 병][무서운 전염병] 등의 마이너스 이미지를 가지는 [()]라는 말을 [한센병]으로 바꾸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역사적인 용어로서 쓰는 경우에는 [()]로 통일했다. 오히려, [()]라고 하는 무게를 생각하면, 말을 바꿈으로서 자신의 기분을 [가볍게]하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현()들의 비판을 바란다.

 

 옛날 쿠마소()) 고대일본의 큐슈()남부에 살던 성질이 난폭한 종족. 또는 그 지방의 이름

와 삼한(߲)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하며, 조선의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는 그 삼한과 가장 깊은 관계를 가지는 곳입니다만, 일본으로부터 수출한 것인지 삼한으로부터 수입한 것인가를 생각해 본 것입니다. 옛날부터 일본과 조선과의 교통은 상당히 빈번하여, 도자기나 개간()에는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들어왔으며, 쿠마모토()와 카고시마()지방도 그러합니다.

 카토오 키요마사(ʥ)가 삼한정벌에서 조선의 왕자를 포로로 잡아온 적도 있습니다만, 현재에도 전라남북도로부터 일본에 와 있는 환자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목하 10명의 수용환자가 있으면 그 중의 한사람은 조선인의 비율로, 실로 큰 문제입니다.

 현재 일본에서 환자가 100명을 넘는 현()은 아이치(), 쿠마모토(), 효고(ܲͷ), 미야자키(), 카고시마() 등 몇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음에 불과하지만, 선인()들이 자꾸 들어오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후생성()에서도 고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옛날부터의 일들을 생각하면 일본은 수입국 일지언정 결코 수출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인 나환자들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 주시기를 후생성에 건의하는 바입니다(p.102).

 

 이것은 194936일 나가시마() 애생원에서 [나병리강습회]가 개최되었을 당시의 미츠다 타케스케()의 강연내용이다({()에 관한 논문, 3} Ԧ, 1950).

 미츠다는 [카토오 키요마사(ʥ)의 삼한정벌이라던가 센징() 등의 [차별어]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인 나환자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 주시기를 후생성에 건의하는 바입니다]라는 식으로, 조선인 한센병환자에 대한 특별한 대책의 강화를 후생성에 건의하고 있다. 이러한 비과학적 강연이 있은 28개월 후인 1951118, 12회 국회참의원 후생위원회에서 미츠다()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소위 [3원장의 국회증언]이다.

 

 참고인()그 외에 나예방에 참고가 되는 것은, 저는 미리부터 조선인의 내지(Ү)로의 이동문제 (중략) 조선의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 4도에 나병의 소굴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윌슨의 이야기에 의하면 25,000명의 나환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빈번히 아이를 낳고, 그리고 그 아이들이 나병에 걸리는 식으로, 내지(Ү)에는 2,0003,000명의 나환자가 있다고 하나, 조선에는 2만여명의 나환자들이 내지(Ү)에 가까운 장소에 소굴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본인은 일찍부터 매우 우려하고 있던 사람으로, 작년에 가서 봤을 때는 전국 10개소의 요양소에 450명 정도가 입소에 있었으며 (중략)

 전라남도 고흥군의 소록도라는 곳에 원래 6,000명의 수용소가 건립되어 있었는데, 그게 역시 일본의 관리 하에 있었을 때는 6,000명을 충실히 수용했으나소록도의 상황 등을 잘 관찰하여, 거기에 일본의 힘을 가해 준다거나, 혹은 국제연합의 힘을 가함으로서, 원래처럼 부흥시켜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략) 조선이건 인도이건 가서보면, 나환자가 어린이를 안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콜로니라고 해서, 거기에 순례자들이 가게되면 바로 아이들이남녀들이 모여 어린이가 생기게 된다. (중략) 우생()수술을 실시하는 것이 어떠냐는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만, 이것도 정명(٥)황후님의 나병을 예방하라는, 치료보다도 예방이라는 그 취지를 받들어 그런 사실을 세계 각 국에 선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인과 나환자]에 관한 이 미츠다의 국회증언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전술한 우방시리즈·제9 {조선의 구라사업과 소록도 갱생원}을 쓴 조선총독부의 관료였던 하기와라(߲) 그룹들의 주장과 동일선상에 있는 것으로, 즉 일본통치하의 소록도갱생원을 [조선통치의 본질을 표징하는 선정()]으로 보고 [총독통치의 자랑할만한 유업]이라 하여 그 부흥의 필요성을 제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츠다()는 전전()과 전쟁 중에 소록도갱생원을 방문하여 [조선의 나()와 소록도갱생원]에 관해 몇 편의 글을 남기도 있으나 [미츠다의 국회증언]은 그러한 주장의 되풀이였다.

 [잘못된 일본의 나() 행정시책이 강행되었던 조선]이라는 반성과 사죄를 미츠다는 죽을 때(19645)까지 하지 않았다. 미츠다가 관심을 가져야 했던 것은 소록도의 적벽돌 건물이나 수용환자의 숫자가 아니라 격리수용된 조선인 한센병환자가 어떠한 [보호와 치료]를 받아왔는가를 의사의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미츠다가 [구라(ϭ)의 기치아래 격리를 최선책으로 믿고, 그에 생애를 바친 사람](1995413일의 [나예방법]에 관한 일본나학회의 견해)이라 하더라도, 소록도를 비롯한 조선 전토에서 벌어졌던 무참함을 묵시하는 것은, 오랜 동안 식민지지배와 통치를 행한 일본인으로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일 것이다.

 그러한 미츠다에게 일본정부는 1951113일 문화의 날에, [구라의 아버지]로서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미츠다의 국회증언을 게재한 [참의원 후생위원회 회의록]은 누구나 볼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 [나예방법]의 개정을 심의하고 있던 참의원 후생위원회의 위원이나 이사들은, 참고인으로 불려온 미츠다 증언의 영향을 받았음에 분명하다.

 미츠다의 국회증언이 있었던 해로부터 50년이 되는 지금까지, 일본 식민지하의 소록도갱생원에서 행해진 격리정책과 조선인 한센병환자에 대한 미츠다의 [망언]에 대해, 그 책임을 묻는 논의가 일본에서는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다. 이 책자가 이러한 문제를 규명하는 실마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에 대해, 만일 우리들 일본의 민중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용서한다면, 우리들은 {비작위적 작위}에 의해 또 다시 공범자가 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전후의 일본인은 [피해자]의식에 깊숙이 파묻혀 [가해]의 사실을 직시하지 않았다. 피해를 입은 국가들과 지역의 민중들에 대해, 배상책임이 있다는 사실조차 오랫동안 잊은 채 지내온 것이다]라는 스즈키()씨의 말({전쟁책임과 젠더()}, 미래사, 1997, 114)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조선인과 한센병환자]에 대한 국회에서의 미츠다 증언의 두 번째 문제점은 [우리들이 가장 곤혹스러워 하는 것은 조선의 나환자들이 일본의 부랑자들을 대신하여 빈번히(한센병을-필자) 내지로 전파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근거없는 내용의 증언을 함으로서, 조선인 한센병환자들에 대한 혐오감과 공포의 감정을 일본인들 사이에 퍼뜨린 일이다.

 

 {버림받은 환자사상으로서의 격리}의 저자로 알려진 시마다 히토시()(1926-95) [하지 않으면 안될 작업의 시작후지노 유타카() {일본 파시즘과 의료}를 읽고]라는 서평 속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유고집 {} 수첩사, 1996).

 

 저자는 본서의 [총괄과 전망] 속에서, 금후의 연구과제의 하나로 당시의 식민지, 점령지의 실태규명을 들고 있다. 조선의 소록도갱생원에서는 내지(Ү)의 소장()회의가 몇 번이나 요망하면서도 실현하지 못했던 형무소를 일찍부터 설치하고 있었다.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현지의 환자들이 어떠한 처우를 받고 있었던가를 추측할 수 있다.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곤란이 예상되나 그 규명이 기다려진다(p.133).

 

 시마다()씨는 21세 때인 194799, 미에현(߲)에서 나가시마 애생원으로 한센병환자로 입소하여, 19951020일 애생원의 병실에서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말기 암으로 수척한 그의 몸에는 본인의 강한 의향에 따라 일체의 생명연장기구는 물론 산소호흡기조차 부착되어 있지 않았다. 베개 옆에는 사회운동관계 신문과 팜프렛이 펼쳐진 채로 놓여있었다.

 

 의료의 현장에서는 옛날부터 의료자()가 강자(˭)였다. 특히 의사가 그랬다.

 의료 현장에서 강자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병이지 환자가 아니다. 한센()병은 의료자의 관심이 환자가 아닌 병이었던 아주 극단적인 케이스였다. 하나의 질병에 대한 한 나라의 정책이 확립되고 강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의료자의 의지 그것도 개인으로서의 의료자의 의사()가 일방적으로 관철된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일본의 한센병대책의 기본은 격리였다(시마다 히토시() [격리의 방법], {해방교육} 174, p.9, 198312)

 

 시마다씨는 99, 나가시마 애생원의 치료센터 2층의 병실에서 병문안을 간 필자의 손을 잡고 [조선의 나() 연구를 계속하여 주십시오. 자료의 스크랩 등은 후타미(̸)씨를 통해, 애생원의 카미야()서고에 보관해 놓았으니, 그것을 활용하여 연구를 계속해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말기 암 병상에서의 필자에 대한 시마다씨의 최후의 말씀이었다. 40일 뒤인 19951020일 저녁, 시마다씨는 젊은이들의 손을 쥔 채 영면()했다. 시마다씨와의 약속을 필자는 아직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