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격리정책의 전개    


2. 초창기의 소록도자혜의원

      -초대원장 아리카와 토오루()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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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1230일부터 6일간, 미츠다 타케스케() 전생()병원장으로부터 조선의 한센병 사정의 시찰을 명 받은 동() 병원 의원() 하야시 후미오(, 1900-47), 섣달 그믐날 아침을 조선 남해의 한려수도를 달리는 복창환() 선상에서 맞았다.  

 하야시()는 토오쿄부(ݤ) 히가시무라야마(ߣ) 산골짝의 전생병원의 동료인 후지타(߲), 미야카와(), 시오누마(), 타지리(Ͷ)의 네 사람 앞으로 다음과 같은 엽서를 보낸다.

 

 19301231, 오전8

 눈을 뜨자마자 급히 갑판에 오른다. 지난밤의 어둠은 사라지고 초록바다가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가파른 조선해안의 바위와 섬들이 붉은 살결을 아침햇살에 들어내고 있다. 동쪽을 바라보니 수평선 위에 새빨간 태양이 솟아오르는 참이다.

 2등실은 나 혼자다. 갓 항해를 시작한 만함(ػ)식의 장식이다. 9시 반에는 여수에 도착한다고 한다.

 윌슨에게는 전보를 쳐 두었다.

 

 하야시 후미오()는 섣달 그믐날 밤을 윌슨 원장이 있는 순천에서 보내고, 설날 아침, 윌슨의 환송을 받으며 자동차로 벌교, 고흥을 거쳐 녹동에 도착, 소록도에 입도한다.

 하야시는 {일본MTL}20(193110) [잊기 어려운 형제, 소록도를 방문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야자와()원장 댁의 신년연회가 한창일 때 룩색을 짊어진 채 불쑥 뛰어들게 되어 몹시 미안했다. 이곳은 지세() 관계상 병사가 남북 둘로 나뉘어져 있다. 관사는 그 사이의 고지()에 있다. 북쪽은 전부터 큰 쪽으로 550명의 환자가 있으며, 남쪽은 새롭게 확장된 쪽으로 200명 정도밖에 없다. 750명의 환자 속에 두 사람의 내지인이 있었다. 한 사람은 북쪽 요양지에, 한사람은 남쪽에 있으며, 북쪽사람은 N이고 남쪽사람은 M(߲)이라 한다.

 

 수용환자가 6,000명으로 불어난 4대 원장인 스호오 마사스에()의 소록도갱생원, 한센병요양소 때와는 달리, 이 시기의 소록도 자혜의원은 초창기의 모습이 상당부분 남아 있었다. 그럼 소록도 자혜의원은 언제, 어떤 의도로 조선 전라남도 남단의 섬에 창설된 것일까?

 

 조선총독부의 위생고문(촉탁)으로 한센병 대책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야마네 마사지(ߣ)이다. {애생()}194010월호에 미츠다()원장의 [토노야마(ߣ) 야마네 마사지 선생을 그리며]라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와 일본의 나예방사업} 1958, 간행, 436). 그 가운데서 미츠다 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야마네(ߣ) 선생은 아오야마(ߣ), 요시후루(ͯ), 모리(ߵ) 선생과 마찬가지로 동경대를 명치(٥)5년에 졸업했다. 쵸오슈()의 하기()출신으로 유신 이래로 선배들 중에 지기()들이 많았다. 선생은 이토()와 소네이(??) 양 총감은 물론, 테라우치(Ү) 총독과도 극친한 사이였다. 조선 초기의 위생고문으로서, 명치 말부터 대정()5년까지 조선의 위생행정에 공헌했다. 소록도 선택 당시인 대정() 4년경, 선생의 섬이냐 육지냐는 물음에, 요시가(ۻ) 군의감과 사토()) 사토오 고오조(˧1880-?) 조선총독부 의원() 교관, 동 의원 의무과장, 19164월에는 경성의학전문     학교 교수 등을 역임

씨 등이 실지검분()에 임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나, 현재는 내지(Ү)는 물론 조선에서도 선생의 관심사였던 나예방사업이 일대 약진을 이루었다.

 선생은 69세로 대정14829일 동경의 오치아이(ժ)에서 돌아가셨으니 올해로 꼭 15주년이 되는 셈이다.

 

 야마네 마사지(ߣ)5년간, 유럽 그 중에서도 특히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의 법의학을 연구한 뒤 귀국하여 경시청 제3부장, 경찰의장()으로서 동경의 위생행정을 맡았으며, 관직을 떠난 뒤에는 전후 6회에 걸쳐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그 간에 [나예방법안]을 제국의회 중의원에 제출(1906)하는 등, 일본의 한센병 대책과 한센병환자의 격리의 필요성을 강조, 결국 1907년의 법률제11 [나예방에 관한 건]으로서 41일부터 동법이 시행되어 일본은 [국책]으로서 한센병 대책을 시작하게 된다.

 야마네는 미츠다 원장의 말대로 [조선초기의 위생고문으로서 명치(٥)말부터 대정() 5년까지] 조선총독부 촉탁이라는 직함으로 식민지 조선의 위생행정에 관여하여, 조선인 한센병환자의 격리를 목적으로 하는 시책추진과 시설실현에 진력했다.

 

 1915년 당시의 조선총독부 의원장()은 요시가 에이지로(ۻ, 1864-1953)이다.

 요시가는 육군군의 출신으로 1887년 동경제국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육군에 입대하여 1888년에 2등육군군의에 임명된 뒤 1910년에 군의총감으로 진급, 1914년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의원장과 경성의학 전문학교장을 겸하게 된다. 총독부 의원장의 전임자는 후지타 츠구아키()(역시 군의총감)이며, 후임자는 적리균(ж)의 최초발견자로 유명한 시가  키요시(̾1870-1957)이다.

 일본의 근대의학은 육군군의총감이던 모리 린타로(ߵ, )가 그러했듯이 독일에서 유학한 군의()들의 영향이 강하다. 초기의 식민지(대만·조선) 의료에서의 군의들의 역할에 관해서는 사쿠마 온코() [초기 식민지 의료에서의 현역군의의 역할]({일본의사학잡지},30권 제2, 19844)이라는 논문에 언급되어 있다. 일본의 식민지통치가 [생명의 안전과 건강증진을 위한 의료위생의 충실에 있으며][이 원칙이 지켜져, 특히 의료가 뒤떨어진 대만과 한국에서 이 방면에 노력이 경주()되었고, 그 큰 역할을 현역 군의들이 다했다]라는 사쿠마씨의 논지에 대해서는, 군의들이 식민지의료에 관계했다고 하는 사실은 인정하나, 그 역할의 평가에 관해서는 필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총독부 의원장 요시가 에이지로(ۻ)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기고 있다. {요시가 에이지로 자서전}(1950)은 전후에 출판된 것이지만, 이 원고는 1934년에 기고하여 1935년에 탈고한 것이다

 [조선 시정() 25주년에 즈음한 감회 본인의 기억에 새로운 것은 소록도 나요양소의 개설이다. 원래 조선의 나환자 수용시설은 외국인들의 손에 의해 국내 23개소에 설치되어 있었으나대단히 유감스러운 점이 많았기 때문에, 총독부로서는 어딘가에 소규모이더라도 완전한 요양소를 설치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이를 기후온난한 남조선지방, 즉 경상남도 부근의 연안 도서() 중에서 적지를 찾고 싶다는 뜻에서당시 총독부 위생사무 촉탁이었던 현 사토() 의전교장()에 위촉하여](p.253) 사전 점검토록 하여 대략의 목표를 정했다. 마지막 결정을 하기 위해 19154월경 경무총감부의 경비선을 빌려 전라남도 목포부에서 경상남도 부산부 사이의 섬을 돌아본 뒤, 소록도를 한센병환자 수용소 개설을 위한 최선의 후보지로 총독부에 보고함으로서 최후의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요시가(ۻ)가 한센병 수용소의 설립지를 사전 점검케 했다는 사토 고오조(˧)의 저서인 {조선의육사()}(1956) [소록도 나요양소의 개설]의 항에는, 요시가의 글과는 약간 다른 내용이 쓰여 있다.

 

 나환자 수용시설은 1916년 봄에 개설되었으나, 그 때는 소록도 자혜의원이라 불렀다. 원장은 아리카와 토오루()라는 군의로, 내가 평양 자혜의원에 있을 때 의관(ί)으로 평양에 부임해 왔다.

 (총독부)내무부 제2과장이었던 오오즈카(߲)는 나에게 나환자들의 수용소는 형태만 있으면 된다, 세계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나환자들의 수용시설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리는 정도로 충분하므로 그렇게 알라고 하였으나, 우가키()총독 시절에 본격화됨으로서 훌륭하게 확충되어, 결국은 소록도 전도를 매수하는 대규모 사업이 되었다.  

 

 어쨌거나 1916224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로 전라남도 소록도자혜의원은 창설되었고, 같은 해 3월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소록도의 서쪽 끝 299,700(섬의 약 1/6)과 민가 10(건평 87)이 매수되었다. 동년 710일 초대원장에 아리카와()가 임명되었다. 아리카와는 정6위훈5(׿)으로 육군 일등군의(대위에 해당)였다.

 같은 해 7월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다음해 1월에는 본관 외 47388(1,280)이 준공되었고, 한센병환자 100명을 정원으로 하여 각 도(Գ)로부터의 환자수용이 시작되어 연말에는 99명이 수용되었다. 이후, 아리카와는 의원면직되는 192166일까지의 411개월간 환자들에 대한 식민지 의료를 강행하게 된다.

 당시의 개설된 소록도 자혜의원의 모습과 그 특징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

(1)식민지 의료와 환자에 대한 일본식 생활양식의 강제(˭)

 {아으, 70년찬란한 슬픔의 소록도}(1993)에서 심전황()씨는 아리카와 원장시절의 일들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치료소, 직원관사, 사무본관, 예배당, 목욕탕, 취사장, 병사 등을 준공하고 1917517일을 기해 개청식을 거행했다. 지방에서 강제 모집되어 온 약 40명의 환자를 남녀병사에 각각 수용했는데 일본식 생활양식으로 훈련시켰다. 남녀를 막론하고 입원 즉시 입고 온 한복 등을 벗겨버리고, [하오리] [하카마], [오비][훈도시][게다] 등으로 바꿔 입히고 식사도 [오왕] [하시]를 놀려 [다꾸앙]을 먹게 했으며, [카미다나()] 앞에서 짝짝 손뼉을 치도록 했다.

 잠자리도 물론 [다다미]방이었다. 한국식 생활습관에 젖은 환자들로서는 이 일본식 생활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중략) 저녁8시가 되면 통행금지로 이웃집에도 못 가게 하고, 취침 전에 매양 인원 점호가 있고, 전문 26조로 된 요양생활의 [심득서()]란 걸 월말에 한 번씩 낭독 또는 암송해야 하는 등, 통제가 너무 심해서 도대체 제대로 즐겨 볼 여가가 적다.

 본가(ʫ)와의 통신이나 가족과의 면회도 제한되어 귀성() 같은 것은 아예 바라지도 못하는

 너무도 엄격한 통제에 견디다 못한 환자들이 좀 완화해 줄 것을 아리카와 원장에게 누차 건의했건만 원장은 일축해 버리고 여전히 빈틈없는 규칙생활을 강요했다.

 

 예배당에 대해서는 요시가 에이지로(ۻ) () {매일신보}1917531일의 기사 [소록도의 별천지, 문둥병 환자를 수용하는 곳90명 환자들은 이 부락생활을 즐긴다] 속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병실 외에는 예배당도 설치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천조대신()과 석가여래불이 봉안되어, 직원들을 비롯한 환자들의 예배소가 되어 있었다.) 타키오 에이지(ڭ) 편저 {일제하 조선의 나()정책과 소록도를 산 사람들} 히로시마() 청구문고,

  (1995) p.91

 

 

 병원의 직원은 아리카와 원장의 밑으로 의원 1, 서기 1, 약제사 1, 간호사 4명이 있어(19175월 현재) 치료를 담당했다. 아리카와 원장시대에 수용환자의 사망자수 및 사망률이 극히 높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리카와 원장시대인 1917-21년 사이의 수용환자의 사망률이 2대원장인 하나이 젠키치() 시대(1922-29)1.1%-3.1%에 비해 월등하게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보된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환자들은 그 은혜에 감읍하여]라는 {매일신보}의 요시가 총독부 의원장의 거짓말(1917531)과 다음의 (-1)을 비교해 보면 식민지 의료의 본질을 잘 알 수가 있다.

년 차 별()

1917

1918

1919

1920

1921

1922

1923

1924

1925

1926

1927

수용환자수()

  99

 93

  96

 101

134

 187

 223

222

276

275

271

사망환자수()

  26

  8

   7

   7

  8

  2

   5

  4

  5

  7

  7

사 망 률(%)

26.26

8.60

7.29

6.73

5.97

1.07

2.24

1.80

1.81

2.55

2.99

(2)[문명국] 일본을 표방하기 위해 구미(ϱڸ)에 보여주기 위한 한센병요양소의 개설, 국가적 체면에 대한 속셈.

 총독부 내무부지방국 제2과장 오오츠카(߲)가 사토(˧)에게 말했다는 [나환자들의 수용소는 형태만 있으면 된다, 세계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나환자들의 수용시설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리는 정도로 충분하므로 그렇게 알라]라는 말은, 당시 총독부 의무관료의 의향의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국가적 체면에 대한 속셈은 [1937년 도경찰부장 희망사항]에 언급되고 있는 [경기도]로부터 [나환자 수용의 건]에서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총독부의 한센병정책이 개별적인 환자를 병이나 비참한 생활로부터 구제하거나, 의료보호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명확하다.

 

 (소록도요양소로의) 본도(Գ)로부터의 수용은 전무()하며, 국제도시인 경성(), 인천과 같은 도시를 가지는 본도로서는 지극히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 중에서도 경성부와 같은 경우에는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내지(Ү) 및 여러 외국으로부터의 내왕자가 많다는 점에서 조선과 내지의 여러 도시와는 사정이 전혀 달라서, 동 부내(ݤҮ)에서의 나환자들의 배회는 단순한 보건위생상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통치의 면목에 관계되므로) {일제하 지배정책 자료집} 7, 고려서림(1993), p.480

 

 

 당시 일본 통치하의 조선의 한센병 환자수는 5,000명에서 15,000명 안팎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앞의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17-1921년의 소록도 자혜의원의 수용 환자수는 93명에서 134명에 지나지 않는다. 즉 조선 전체의 한센병 환자수에서 본다면 1-2%에 불과한 것으로 [나환자의 수용소는 형태만 있으면 된다]는 조선총독부의 간부관료인 오오츠카의 의향은 훌륭하게 구현되었던 셈이다

(3)일제 식민지 지배의 유지·강화를 위해 구미(ϱڸ) 의존적 기독교 []요양소를 배척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일본과 일본인}821(192111월호)에 게재된 무라타 마사타카(, 1884-1974) [조선의 구라(ϭ)문제]의 내용을 검토해 보자.

 무라타의 조선한센병 정책에의 제언과 식민지 인식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의 유지·강화를 위해 기독교 의료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한센병요양소를 배척, 배제하는 것이었다. 무라타는 동경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 미츠타()의 의견에 따라 동경전염병연구소 혈청부에 들어가 한센병환자의 혈청연구에 몰두한다. 무라타의 [조선의 구라문제]라는 논문은 동경 전염병연구소 시대, 조선 남부의 한센병 사정을 시찰한 뒤, 192111월호의 {일본과 일본인}에 발표한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소록도 자혜의원이 개설된 5년 뒤로, 조선 근대사상 최대의 반일독립운동(1919)3.1운동의 직후이자, 조선총독으로 사이토 미노루()를 맞이한 총독부가 민족운동의 분단·약체화를 목적으로 식민지 지배의 유지, 강화를 꾀한 [문화정치]가 시작되는 시기에 해당한다.

 무라타는 조선 남부(그는 남선(), 센징() 등의 차별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를 시찰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위생, 사회구제의 방법으로서는 보통의 자혜의원을 중요한 지역에 신설하는 것도 좋은 기획으로서, 현재의 민심상태, 특히 대() 선교사정책으로서는 가장 필요한 시설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시급한 것은 조선에서의 철저한 구라사업의 실시이다. 이는 단순히 나병이 다른 질병에 비해 훨씬 동정해야 할 만한 질병이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대() 외국선교사 정책으로서의 중대한 정치적 이유가 동시에 존재한다]

 [이러한 선인()들을 국민으로 하는 일본제국조선총독부로서 당연히 수행해야 할 일이 아닌가. (중략) 외국인이 하려한다면 하도록 내버려두자고 한다. 배알도 없는 국가란 말인가? 국가로서의 체면도 없다는 말인가.

 [외국선교사들의 인심수습이 선인() 동화정책에 얼마나 악역향을 미치는 가에 대해서는 최근 수많은 씁쓸한 경험을 가지면서도, 약간의 돈이 아까워 인심수습에는 가장 효과적인 이 사업을, 그것도 항상 요주의 인물시되는 이러한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제공하여]

 [본인은 이번이야말로 조선의 대라()정책을 분명히 정하여 외국인에 대한 위임은 절대로 인정하지 말 것을 사이토() 총독에게 희망하는 바이다]

 

 무라다()가 이 논문을 발표한 19213, 6척이 넘는 장신의 소유자로, 거무스레한 얼굴에 큰 코를 가진 한 남자가 아이치현() 기사로부터 조선총독부 기사 겸 경기도 위생과장으로서 부임했다. 바로 이 인물이 스호오 마사스에()로 그에 의해 19년 뒤 식민지 조선의 [전라남도의 소록도]에 무라타의 선생인 미츠다()가 말하듯이 [다년간 외국인으로부터 우롱 당해왔던 일본의 구라시설이 조선에) 미츠다() [소록도갱생원 참관] 194010 {애생()} (등풍협회편 {미츠다()와 일본의 나     예방사업}, p.430).

] 세계 1,2위를 다투는 규모의 한센병시설로 실현된다. 수용환자수 6,000, 건평 62,390, 형무소까지 겸비한 조선총독부 직할의 [구라]시설이 그것이다. 그리고 무라타가 주장한 바와 같이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운영되던 조선의 한센병요양소 3개소(여수, 대구, 부산)는 총독부에 의해서 패원, 폐쇄되게 된다.

 이는 무라타()에 있어서는 실로 경사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4)개설 당초 소록도자혜의원은 한센병환자와 함께 한센병 이외의 진료도 행했다는 사실.

 요시가(ۻ) 총독부 병원장이 {매일신보}(1917531)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진료소는 유독(Ը)지대와 무독(Ը)지대의 중간에 두어 무독지대로부터의 일반환자도 진찰을 받을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최근에는 이 섬만이 아니라 육지로부터도 많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으러 오기 때문에 병원은 항상 매우 바빴다) 전게 {일제하 조선의 나()정책과 소록도를 산 사람들} 히로시마() 청구문고, (1995) p.91

]고 한다. 환자지대를 [유독지대]라고 차별적으로 부르면서 환자지대와 직원지대의 사이에 경계선을 마련하여, 출입구에는 탈의실을 설치했다(권말의 소록도 자혜의원 배치도). 앞의 요시가 총독부병원장의 담화가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한센병 이외의 지역진료도 하고 있었던 것은 {관보(ί)}등의 기록에 비추어 보아 분명하다. 3.1독립운동(1919) 뒤에 전개된 [문화정치]의 파도는 이 곳 전라남도 소록도 자혜의원에도 밀려온다. [무단정치] 하의 아리카와 토오루()원장에게 대신하여 소록도 자혜의원에 하나이 젠키치(, 육군2등군의정)가 제2대 원장으로 부임되어 온 것은 1921623일의 일이었다.

 

 

 

 

 

 

 

 

 


I 격리정책의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