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격리정책의 전개    


3 [문화정치]기의 소록도 자혜의원

  2대 원장 하나이 젠키치()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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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계(). 며칠전인가 소록도를 찾았더니 어느 틈엔가 나뭇가지마다 봄들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미 겨울은 지나간 듯 합니다.

 괴로운 생활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긴 겨울을 보내온 이 곳 사람들에게 언제나 해방의 아침이 올까를 생각하면, 곧 만개할 봄꽃들의 화려함도 쓸쓸하게만 생각됩니다.

 그러나 올 겨울, 우리들이 소록에서 만나 긴긴밤을 함께 보내면서 생명과 생명이 부딪쳐 발산되는 따뜻한 열기를 느낀 것처럼, 이 땅의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견디어 나간다면, 결코 슬픈 나날들도 영원하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참길]을 통해 배우려 생각합니다]

 이 문장은 19973, 한국 대구에 본부를 둔 [참길복지사회연구회]의 이사장 정학()씨로부터 받은 편지의 첫머리 부분이다

 [참길회]1989년부터 매년 여름과 겨울의 2, 각각 34일간, 한국의 젊은이들을 모아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국립소록도병원(한센병요양소)에 입원해 있는 1,000여명(1997년 현재)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상으로, 젊은이들은 다양한 봉사활동고장난 전기기구의 수리, 벽지 바르기, 붕어빵 구워주기, 뻥튀기, 온돌에 사용하는 연탄 나르기 등이지만,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오히려 노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필자도 작년 여름과 겨울, 연속해서 히로시마의 친구 네 사람과 함께 129일부터 21일까지의 소록도병원 봉사활동에 참가했다. 히로시마()로부터 소록도를 방문한 우리 일행 5명은 활동의 짬을 내어, 참길회에서 제공해 준 승용차로 섬을 돌아보았다. 소록도는 애생원()이 있는 오카야마현(˪ߣ)의 나가시마()2배정도의 크기로 차를 빌릴 수 있어 큰 다행이었다.

 일제통치시대에 만들어진 시설들이 섬의 여기저기에 산재(ߤ)하고 있다. 감금실, 단종대(Ө), 화장터, 만령당(납골당), 중앙공회당, 초창기의 진료소, 선착장, 백악()의 등대, 큰 우물, 폐허화한 소록도신사 본전과 참배당, 일본 황태후의 어가비(ʰ), 형무소, 병동, 창고등 전전()의 한센병요양소를 방불케 한다.

 이번의 테마로 잡은 소록도 자혜의원의 2대원장인 하나이 젠키치() [창덕비()]도 개축된 초창기 진료소의 동측 도로변에 세워져 있었다. [하나이원장 창덕비()]라고 표면을 음각한 흑색의 석비()는 높이가 3미터 정도로, 뒷면에는 하나이 원장의 생전의 업적이 새겨져 있다. 하나이 원장이 죽은 다음해의 19309월에 세워진 것으로 발문(ۢ)은 제3대 원장인 야자와 슌이치로()가 쓰고 있다. 전문은 214자의 한자로 씌어져 있지만, 참고로 현대문 번역문을 다음에 소개한다.

 

 전라남도 소록도 자혜의원은 대정()5(1916) 2, 명치천황의 하사금을 기금으로 설립된 조선내의 유일한 나병 전문병원이다. 처음에 아리카와 토오루()가 원장으로 부임했고, 같은 해 6월에 하나이 젠키치()가 제2대 원장이 부임하여 예의() 원무()를 혁신했으니 모든 언행은 자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를 열거하면 의복과 식량의 개선이 그 하나이며, 통신·면회의 자유가 그 둘이며, 중증환자실의 신설이 그 셋이며, 두 번에 걸친 병원의 확장이 그 넷이다. 위안회()의 창설이 그 다섯이며, 정신교육을 베풀어 오락기관을 마련한 것이 그 여섯이며, 상조회()의 조직이 그 일곱이다. 이로 인하여 700여명의 환자들이 별세계에서의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이씨는 소화4(1929) 1016일 갑자기 서거함으로서 환자들은 곡읍(), 비분()했으며, 서로 상의하여 이 비를 세웠다.

           소화() 5(1930) 3대 원장 야자와 슌이치로() ()

 

 2대 원장 하나이 젠키치()는 일본인 원장으로서는 조선인 한센병환자들의 추앙을 받은 유일한 인물로 육군2등군의정()(중령)에 정5위 훈3등으로 고등관 3등이었다.

 1921623일에 전라남도 소록도자혜의원장에 임명되었으며 전임의 초대원장 아리카와 토오루가 1등군의(대위) 6위 훈5등이었음에 비해 육군의 계급·위계가 높았다. 소록도에 원장으로 부임했을 때 58세였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령의 부임이었다고 할 수있다.

 1929101666세로 이 섬에서 사거()하기까지의 84개월간, 창덕비의 비문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인 한센병환자의 의료와 생활개선에 힘썼다.

 필자가 최초로 소록도를 방문한 것은 2년 반전인 19953월이지만, 그 때 섬에서 들은 것은 다음과 같은 하나이 원장의 에피소드였다

 

 하나이 원장은 자신이 나병에 걸리지 않으면 환자의 기분이나 괴로움도 알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이부자리에서 환자와 자기도 하고, 환자의 고름을 자기의 상처에 바르기도 했지만 나병에는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이 원장은 아름다운 환자, 어떤 젊은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가씨의 피를 뽑아 자기 혈관에 주입하여 자기도 나병환자가 되려 했습니다. 하나이 원장은 나병에 걸려 사거한 것입니다

 

 후일 서울에서 한국한센병 요양소의 전()후원회장이었던 노인으로부터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이 원장은 어떤 여성환자를 깊게 사랑하여, 그녀와의 사이에 두 명의 아이를 두었습니다. 하나이 원장은 소록도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끝내고 자살한 것입니다. 하나이 원장의 사후, 두 아이는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하나이 원장의 죽음에 관련하는 이야기는 둘 다 사실이 아니라 [하나이원장 전설]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대한나관리협회의 {한국나병사}(1988)에 기록된 바와 같이 [다음해(1929)의 수용능력은 300여명이 다시 증가되었고, 이에 비례하여 늘어나는 환자들의 진료는 의사의 직무로서는 너무 무리하게 불어났을 뿐 아니라 의식주까지도 돌보아주어야 하는 격무]에 의한, [과로에 의한 순직]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왜 전술한 바와 같은 하나이 원장의 사거()전설이나 풍문들이 한국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은 민족이라든가 국경을 초월한 하나이 젠키치의 한센병환자에 대한 시선을, 환자들을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보고, 접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이 느꼈기 때문이지 않을까? () 한국한센병요양소 후원회장이었던 노인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해방 후, 이승만대통령 치하에 일본인에 관한 현창비(), 기념비는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당시의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땅 속에 숨겨졌다가 20여년 뒤의 박대통령 시절에 다시 세워진 일본인의 비()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경기도 수원시 교동에 있는 노리마츠 마사야스()10) 노리마츠 마사야스(, 18631921)는 일본최초의 기독교 해외전도자이다. 1896년부터 조선인에 대하여 조선어로 오로지 복음만을 전했다. 한석희(ۡ)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전도} 일본기독교단 출판국(1985) p.15-84, 한석희저 {일본의 조선지배와 종교정책} 미래사(1988), p.133-155 참조.

의 비입니다. 노리마츠는 기독 동신회() 전도자입니다. 또 하나는 소록도 자혜의원장인 하나이 젠키치의 창덕비입니다. 원장은 한국의 한센병환자를 마음속으로부터 사랑했고, 한국의 한센병환자도 하나이 원장을 추앙했습니다].

 

 하나이 젠키치가 소록도에 부임한 2년 뒤인 1923년에 하나이는 [소록도 자혜의원의 나환자통계]라는 제목의 논문을 {조선의학회잡지, 42}(4월호) {만주의 의계(ͣ), 28}(7월호)에 발표하고 있다. 그것은 [전라남도 소록도자혜의원에 수용된 한센병환자 145명에 대한 통계적 관찰]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자기 병원의 환자를 관찰하여 그것을 의학회에 발표한다는 것은, 당시 한센병 진료의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나이 젠키치를 평가할 경우, 또 하나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2번에 걸치는 병원의 확장(1923년 및 1927-28년의 신축공사)]에서 볼 수 있는 원장의 처해진 [입장], 즉 자신의 바탕이 되는 [존재]라던가 혹은 계급성(ͭ)과 같은 것을 뛰어넘는 어려움이다. 하나이는 조선총독부의 유일한 []요양소의 장()이었다. 일제하 조선에서 조선인의 한센병 발병이 급증하고, 부랑·걸식, 아사·동사하는 한센병자가 증가하던 현실을 보더라도 가능한 한 많은 환자를 자기 가까이에 인수하고 싶어했음에 분명하다.

 당시의 소록도 자혜의원의 수용인원 정원과 실제 수용인원과의 현황은 어떠했을까.

년도()

1917

1918

1919

1920

1921

1922

1923

1924

1925

1926

1927

1928

1929

정원

100

100

100

100

100

100

100

125

125

125

250

450

750

수용인원

73

85

89

95

121

171

196

196

241

249

250

443

745

정원에 비해

 

 

 

 

21

71

96

71

116

124

 

 

 

27

15

11

5

 

 

 

 

 

 

 

7

5

비율(%)

73.0

85.0

89.0

95.0

121.0

171.0

196.0

156.8

192.8

199.2

100.0

98.4

99.3

 초대 아리카와 원장시대(1917-1920)에는 정원 100명을 밑도는 73-95명이었던 수용인원도, 하나이 원장시대 전반에는 수용인원이 정원을 크게 상회하기 시작하여, 1923년 이후에는 2배쯤으로 불어난다. 그리고 신축·증축되어 정원이 증원된 1929년에는 소록도에 부임된 당시의 6배가 넘도록 수용인원이 증가되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929년도의 {소록도자혜의원 개황}에 의하면 [건물]의 신축·증축의 평수는 다음의 (-3)와 같다.

  한편, 섬의 원주민들은 한센병환자에 대한 기피감정과 함께 무엇보다도 소록도 자혜의원 확장에 의해 선조전래의 토지, 가옥, 묘지 등을 강권에 의해서 빼앗김으로서 생활의 기반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불안과 현실이 있었다.

년 월

19171

19183

19223

19233

19243

19253

192712

192812

합 계

동 수

       47

        4

        5

       20

       13

        5

       33

       68

 

평 수

    388.69

      4.16

     32.50

     10.00

     81.90

     44.50

    627.05

    701.16

  1,889.96

비 고

창설시

신설

고용인욕실  기타

 중증실,

 병사 기타

변 소

병사6

기타

약제창고

기타

남병사20동 기타

병사27

기타

 

 19269월에 조선총독부·전라남도에 의해 [소록도 자혜의원 확장에 따른 토지취득]을 통보 받은 섬의 농어민들은 반대투쟁을 전개했으나 권력의 탄압에 지고 만다.

 섬 주민들이 항의하기 위해 원장관사로 몰려든 918일로부터 6일 뒤인 924, 하나이()원장이 조선총독부 경무부 위생과장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전라남도 소록도 자혜의원]의 전용 편지지에 펜으로 쓴 편지로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배계() 진정인들에 의한 당 병원확장지 매입에 대한 반대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으나, 소관의 부덕의 소치로 18일의 충돌이 야기되고, 경찰관 가운데서 수명의 부상자까지 나오게 된 점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말씀드릴 점은 당일 오이카와() 서장 이하, 출장 나온 코바타케(??) 형사가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병원 보호를 위해 분투함으로서, 소관(ί) 이하 직원일동 및 환자 모두가 안전할 수 있었던 바, 병원 측으로서 진심으로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경찰관 중에 부상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한사람의 부상자도 없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매입상의 사무에 좋은 영향을 미쳐, 일의 진척이 빨라진 감도 없지 않습니다. 이 점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상 경찰관들도 경과가 좋아 5명 모두가 치유되었다 해도 지장이 없을 정도이므로, 이에 대해서도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누락된 부분은 각 도(Գ)로부터의 보고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국장, 정무총감각하에게는 귀관께서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쁜 관계상 이만 줄입니다.

                                                                       924     하나이()원장

 이시카와() 위생과장님

  사진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이()원장의 한센병환자를 생각하는 [선의]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덧붙여 말하자면 일본나학계의 [나예방법 폐지요구]의 통일견해(1995413)에서 말하는 [구라(ϭ)의 기치 아래 격리를 최선책으로 믿고, 그에 생애를 바친 사람] 중의 한사람으로 조선의 [()]정책과 의료에 관여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선의]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역사의 현실이다. 그는 조선총독부 경무부의 이시카와() 위생과장에게 보낸 앞의 편지 속에서 [경찰관 중에 부상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한사람의 부상자도 없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매입상의 사무에 좋은 영향을 미쳐 일의 진척이 빨라진 감도 없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이 원장 때인 19269월의 토지매입과 병원확장공사에 의해, 소록도 전체의 1/3이 자혜의원 부지가 되고, 500평 정도에 불과했던 병원건물이 일거에 1,300여평으로 신, 증축, 확장되었다.

 수용환자를 생각하는 하나이() [선의], 그 후 조선총독부의 의향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나예방협회에 의해 소록도 전체가 매수되어, 세계 최대규모의 한센병환자의 격리의 섬을 만드는 길을 열게된다. 19336, 소록도의 150여호, 900여명의 주민 전원이 섬 밖으로 이전되고, 조선 전국으로부터 6,000명이나 되는 한센병 환자가 이 섬에 강제수용 되는 것이다.

 [격리를 최선책으로 믿고, 거기에 생애를 바친 사람들의 마음까지를, 우리들이 유린할 권리는 없다]라고 일본나학회(현·일본한센병학회)는 말한다. [우리들이 유린할 권리는 없다]라는 것은 어떤 행위를 가르키는 것일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필자는 생각한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929년도 {소록도 자혜의원 개황}에 게재되어 있는 [북병사 예배당에서의 목사와 신자]라는 제목의 한 장의 사진) [소록도 북병사 예배당에서의 목사와 신자](1929년도 {소록도자혜의원 개황}

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두 사람의 목사, 전도사와 함께, 86명의 [기품 있어] 보이는 환자들의 모습. 남녀 환자들은 모두 민족의상인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를 입고 조선식 신발을 신고 있으며, 여성환자들은 머리칼을 예쁘게 좌우로 가르고 3열로 늘어서 있다.

 소록도 자혜의원이 창설되었을 당시, 초대원장인 아리카와는 수용환자들에게 일본식 생활양식을 강요했다. 입원과 동시에 환자들이 입고 있었던 한복을 벗게 하고, 하오리, 하카마, 오비, 훈도시, 게다 등으로 갈아입게 하였다. 식사도 일본식 그릇에 젓가락만을 사용토록 하고, 다꾸앙을 먹도록 했으며, 천조대신()을 모시는 카미타나() 앞에서 기도하도록 했다. 이것이 [무단정치]하의 조선인 나환자들에게 강요된 초대원장 아리카와의 요양생활의 방침이었다.

 부임 3개월 후인 1921년 가을, 하나이() 원장은 광주, 부산, 대구, 세 곳의 기독교 의료선교사들이 경영하는 한센병요양소를 시찰했다. 그리고, 아리카와 원장의 병원운영방식의 시정과 개선에 임했다. 옷을 종래의 한복으로 되돌리고, 중앙배급식이었던 식사도 각 병동별로, 각자 환자의 입에 맞은 것을 먹도록 했다. 자혜의원 직원들에게는, 환자들을 멸시한다던가 학대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엄벌할 것을 경고하여, 병원내의 환자와 직원 사이의 상호융화에 노력했다.

 기독교가 소록도에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진 것은 하나이 원장의 시대이다. 1913108, 당시 전라남도 광주에서 전도하고 있던 타나카(߲) 목사(성결교회·홀리네스)가 조선총독부의 포교허가를 얻어 소록도로 들어가, 이틀 간의 집회를 가진 것이 교회설립의 효시가 되었다. 나가시마 애생원의 아케보노()교회의 목사인 오구라()가 쓴 {세토()의 여명}(1959)에 의하면, 시오자키()는 조선으로 건너가, 이상적인 크리스찬의 [나환자촌]을 건설하려 했으며, 한센병환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타나카목사와 알게된 두 사람은 결혼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나이 원장은 야외에서 기도하고 있는 기독교 환자를 불쌍히 여겨, 천조대신()을 모셔 놓았던 곳을 교회 예배당으로 사용할 것을 허용했다. 하나이는 {소록도자혜의원 개황}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원의 시설로서 오직 종교에 귀의하기 위한 예배당을 설치하여 매월 1, 이틀 간 목사를 초빙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으나, 그 때마다 다액의 경비를 요하여, 내지와 같은 봉사적인 고문()이나 강화(˻)를 들을 기회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로써(p.22-23).

 

 그리고 19264월부터 설립된 [환자위안회]의 회비 가운데서, 1929년도에는 [일반위안비]라는 명목으로 부활제 비용(6180), 감사제 비용(30), 크리스마스 비용(110), 그리스도 성화() 대금(4)을 지출하여, 기독교 환자들을 원조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섬에 뿌리를 내린 복음의 씨앗은 열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되었고, 신자가 증가함에 따라서 천조대신을 모신 카미다나()가 철거되고, 기독교 예배당으로 상시() 사용되게 된 것이다.

 하나이 원장은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전술한 {소록도 자혜의원 개황}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보인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교육을 받지 않은 자들이었으므로, 이들에 대한 지덕함양을 목적으로, 환자들 가운데서 학식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남북 양사() 공히 보통학교 교과서를 제공한 즉, 점차로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자들이 늘어남은 진정 기뻐할 현상으로서, 목하 생도수가 187명을 헤아리게 되었다(p.28).

 

 

 


I 격리정책의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