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격리정책의 전개    


5 미츠이 테루이치(߲)의 생애와 한센병 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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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미츠이 테루이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심전황씨의 {아으 70-찬란한 슬픔의 소록도}(1993)를 읽고 나서이다. 미츠이가 제2대 원장인 하나이()의 권유로 조선의 소록도자혜의원에 입소한 사실, 성경과 문학 등을 지도하여 환자들에게 매우 존경받고 있었다는 사실 등이 씌어 있었다. 조선을 식민지 지배하고 있었던 일본통치기에 그와 같은 일본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필자에게는 놀라움이었다.

 미츠이에 관한 것들을 좀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한 필자가, 나가시마() 애생원의 기관지인 {애생()} 편집부의 후타미 미치코(̸ڸ)씨에게 [미츠이(߲)에 관해 아는 게 있으면 아무리 세세한 것이라도 알려 달라]로 부탁한 것이 1996년 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몇 차례에 걸쳐 후타미씨로부터 미츠이에 관한 귀중한 자료들을 제공받았으며, 한국 전남대학교 사회과학과의 정근식()교수로부터도 관계자료를 제공받은 바 있다.

 그런 자료에 따라, 불충분하나마 필자 나름대로의 [미츠이 테루이치의 생애]를 정리해 보기로 한다.

 

 김교신() 주필·발행의 {성서조선()} 82(193531)에는, 소록도 남생리에 수용되어 있던 환자 김계화() [무라이() 선생의 귀국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서신이 게재되어 있다.

 김교신(1901-45)은 동경사범학교 재학 중에 우치무라 칸조(Ү߲)의 문하생이 되어, 조선으로 귀국한 뒤인 19277, 6명의 우치무라 문하생들과 함께 동인지인 {성서조선}을 창간했으며, 19305월의 17호로부터는 김교신이 모든 책임을 가지는 월간 개인지로 바뀌게 된다. [무교회주의][조선적인 기독교]를 추진한 김교신은, 오늘날 한일 양국으로부터 주목받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성서조선} 82(1935111)에 게재된 김계화의 서신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주필() 선생님에게. 저의 나환자 친구로서, 우리 환자들을 위해 젊은 청춘까지 희생한 무라이 준이치()씨라고 하는, [나환자의 리빙스톤]이라는 별명까지 있는 인물을 소개합니다. (중략) 유일무이한 수재였던 씨는 불행하게도 근대의학으로서는 불치의 병이라는 나병에 걸려 본국의 모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애정이 풍부한 무라이()씨는 자기만의 안일과 행복 등 모든 것을 도외시하고 처우가 같고 환경과 운명이 같은 조선의 나환자를 깊이 동정하여현재의 갱생원이라는 이 언덕을 개척하셨습니다

 무라이()라는 농부는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구두끈을 졸라매고 팔을 걷어붙이고 이 섬의 문맹퇴치와, 한편으로는 시대사상을 설파하여 신사상()을 고무했다고 합니다. 교우들의 신앙을 북돋우고 소록도를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9년 간을 하루같이 꾸준히 활동하셨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학원의 일본어 교사로, 교회의 전도사로, 때로는 상조회의 서기로서, 동병(ܻ) 환자들을 위해 다방면으로 피와 땀을 흘리신 무라이 형. 아아 창세기 이후 무라이 형과 같은 분이 몇 분이나 계셨을까?(신정식 편 {김교신과 나자()}, 1989)

 

 이 글 중에서는 [무라이 준이치(]로 기술되어 있으나 이는 미츠이 테루이치(߲)의 가명이다. 미츠이(߲)19011125일 야마나시현(ߣ) 키타코마군(ؤ)의 모 마을에서 태어나, 19458월의 패전 직후에 한센병 요양소인 대만(ؽ)의 낙생원()에서 사거했다. 향년 44세의 젊은 나이었다.

 

 김계화는 미츠이의 성장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분은 지금부터 35년 전출생하여, 양친의 깊은 사랑을 받으며 고향의 학교를 거쳐 고등사범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그 곳의 모 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문예방면에도 다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뿐만 아니라 무라이() 형은 화가였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형은 일찍부터 일본 전국회화작품 전람회에서도 여러 번 우수당선작에 뽑혔으며, 같은 해 킹 지상(߾)에서 장래를 촉망받는 화가라는 격려의 평을 받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미츠이는 한센병을 발병함으로서 군마현(ة) 쿠사츠()의 요양소에 입원하게 되고, 거기에서 홀리네스 교회에 입회, 기독교의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는다. 한편 소록도에서는 1922102일 성결교(홀리네스)의 타나카 신자부로(߲)목사가 조선총독부로부터 포고허가를 얻어 방문하여, 이틀 간의 집회를 한 것이 이 섬에서의 교회설립의 첫걸음이 되었다.

 19216월부터 192910월까지 소록도자혜의원의 원장은 하나이 젠키치()였다

 하나이 원장은 초대 아리카와() 시대에 천조대신()을 숭배토록 환자들을 강요하던 것을 철폐하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천조대신을 모셔놓았던 장소를 기독교 예배당으로 사용할 것을 허가하고, 더욱이 하나이 원장은 환자들의 종교지도를 위해 일본에서 미츠이를 데려왔다. 목사였던 타나카의 시사()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미츠이는 1927년에 소록도자혜의원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지만, 병원당국의 운영방침에 불만을 느끼고 1928년에 퇴원하여 귀국한다. 그러나 타나카()목사의 권유로 1929년에 다시 소록도자혜의원에 입원하여, 배전()의 열의로서 환자들을 위해 진력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김계화의 {성서조선} 82호의 서신에 의하면, [미츠이(߲) 형은 나환자의 기관지인 {나자로}라는 잡지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한때는 색다른 필봉을 휘둘러 나계(ͧ)에 상당한 충동과 자극을 주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레벨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지만, 씨의 피눈물의 결정이었음에는 분명했습니다]라고 한다. 월간으로 발행된 등사판의 소책자 {나자로}, 멀리는 일본, 필리핀의 나요양소까지 보내져서 국경을 넘어 환자들을 교화했다고 심전황씨는 말하고 있다.

 

 미츠이의 소록도에서의 행동을 기록해 둔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있다. 동경부하(ݤ)의 전생()병원 의사인 하야시 후미오(, 1900-47)이다. 1931년 정월, 하야시()는 조선의 [()사정 시찰]을 위해 소록도자혜의원을 방문하여 미츠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같은 해 3, 은사로서 존경하던 전생()병원장 미츠다 타케스케()와 함께 나가시마 애생원에 의무과장으로 옮겨간 하야시() {일본MTL}20(193210) [잊지 못할 형제소록도를 방문하여]라는 제목의 방문기를 싣고 있다. 그 가운데 미츠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약간 긴 문장이나 소개한다.

 

 남쪽 병사에 있는 유일한 방인()은 아까 말한 M(미츠이 테루이치)이다. 그는 쿠사츠()A선생으로부터 기독교의 복음에 접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자로서, 조선의 나환자들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단신으로 소록도에 뛰어들었다. 그의 불타는 성애()는 약 반년만에 조선어를 터득케 했고 많은 나자()들은 그를 통해 기독의 복음을 들었다. 그가 발행하고 있는 {나자로}라는 잡지의 창간호에 그는 [이 물을 마시는 모든 자는 목마르지 않다]라는 제목으로 [드링크 한잔]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그는 그림에 대해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생애를 바쳐 정진()해야 할 것은 이 예술 이외에는 없다고, 젊은 장발의 미술학도는 전심으로 그 길만을 나아갔다.

 그러나 그 도중에 나()가 모든 것을 암흑으로 만들었다. 그가 발행하고 있는 {나자로}12페이지에 불과한 등사판의 소잡지이지만 매우 독특한 것이다.

 페이지의 위쪽 절반은 일본어, 아래쪽 절반은 조선어이다. 앞표지에는 반드시 그가 찍은 소록도내의 생활의 단편이 사진으로 들어있다. 조선여인이 물항아리를 머리에 지고 걸어가는 장면, 빨래하는 장면, 장독, 섬의 나뭇가지 위의 해오라기.

 별로 좋은 사진기도 아닐 것 같지만 실로 예술미 넘치는, 그의 머리의 비상함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M씨에 의해 조선어 찬송가를 하나 배울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한다.

 요양소에 조선인이 입소하면 나는 이 노래를 불러서 그들을 놀라게 한다.

 진실로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주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 남조선 다도해의 고도(͵)에서 살아가는 세상에서 잊여진 사람들도 주님은 사랑하신다. 의심스러운 사람은 소록도를 찾아가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거기에선 조용한 파도소리에 맞추어 수백의 나자() 자신들이 절규한다.

 [예수 사랑하심은]이라는 노랫소리가 드높이 들려올 것이다.

 

 나가시마 애생원의 서기()인 미야카와()는 미츠다()원장의 조선행 동반을 명(٤)받아 1933716일부터 26일까지의 11일간, 조선 한센병시설 시찰여행을 하고 있다.

 그 때의 조선여행의 모습이 미야카와()의 손에 의해 나가시마 애생원의 용전()에 기록되어 현재 카미야() 서고에 보존되어 있으며, 미야카와의 유고집인 {히다(ޫ)에 태어나서}(1977, 신교출판사)에도 [조선의 나()견문기]라는 제목의 7쪽 정도의 기행문이 수록되어 있다.

 미츠다()와 미야카와() 두 사람은, 719일 저녁에 소록도자혜의원에 도착하여 721일 아침에 소록도를 떠나고 있다. 당시의 소록도자혜의원 원장은 야자와()였다.

 경건한 기독교인이던  미야카와의 기록을 보면, 소록도의 미츠이(߲)에 관한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다. 용전()의 메모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소록도의 인상 1. 관사(ί) 사람들의 부자유(교통, 물자, , 전기) 2. 환자주택의 불통일(중략), 4. 미츠이(߲), 코지마() 두 사람의 활동 5직원 및 병자의 대립사상].

 {히다(ޫ)에 태어나서}에 수록된 [조선의 나()견문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이리하여 19일 소록도를 방문했으나 거기서 유쾌한 사실을 발견했다. 입원자 800명중에 두 사람의 내지인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둘 중의 한사람은 미술학교를 나온 사람으로, 독실한 두 형제는 조선인 환우들 가운데서 바울이나 베드로와 같은 복음의 사자()로써 조선에 건너와 조선동포들의 구원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가 다르고 풍속습관이 달라, 처음에는 이단자로 취급받아 내지(Ү)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한다. 그것을 참고 견딘, 융화를 위한 고심이 열매를 맺어, 오늘날에는 직원들이 하는 말보다 이 두 사람의 환우가 하는 말을 훨씬 더 신용하게 되었으며, 직원들도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소록도 800환우들의 신망을 등에 업고, 이 두 사람의 내지(Ү) 출신 환우는 더욱 겸허한 자세로, 복장도 한복을 입고 어린이들의 선생으로서, 보모(ٵ)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요양소 밖의 내지인들의 평판이 좋지 않고, 오히려 요양소내의 내지인이 호평을 듣고 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정말 재미있게 느껴졌다(p.276).

 

 미츠다()와 미야카와() 두 사람의 나가시마 애생원 직원이 소록도를 방문하여 1개월이 지난 823, 소록도로부터 미츠이(߲)와 코지마() 두 사람이 나가시마 애생원을 방문하게 된다. 후일, 나가시마() 사건의 지도자 중 한사람이 된 아키야마(ߣ1901-93)가 남긴 일기에는, 19338월의 미츠이와 코지마 두 사람의 내도()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아오야마(ߣ), 흙담의 꽃(16))

 

 823

 저녁때 스기다(ߴ??)씨 병실에 가니, 소록도의 미츠이(߲)씨와 코지마()씨가 와 있다고 한다. 병실을 나서려 하는데 키모토()군이 와서, 내일 카나리아사()를 빌려 달라 한다.

 미츠이, 코지마 양군()과 간담할 장소가 필요하다면서, 사실은 조금 전에 두 사람을 데리고 카나리아까지 갔다 오는 길이라고 했다(필자주 : [키모토군(]이란 애생원 배급대장에는 키모도 이와키지(1931327) 입원번호 33호로 되어있다. 19041023일생. 1931327일이라면 최초에 나가시마에 온 [개척환자]를 말한다. 그 뒤, 키모토()로 개명. 1935년 제5대 환자대표가 된다.

 토야마현(ݣߣ) 출신)

 825

 미츠이, 코지마의 두 형이 키모토군와 함께 카나리아사로 소생()을 방문했었다고 하나 마침 부재중이었던 관계를 만나지 못함. 소록도의 사진 몇 장과 어린이들의 편지3통이 책상의 위에 놓여있었다(25일의 일기는 일기원본에는 실려있으나 {애생}에는 실려있지 않다.필자).

 826

 미리 연락을 해서 저녁식사 때 조선의 두 형과 만날 약속이었다. 5시가 되어도 오지 않아 식사준비를 끝내고 바로 전화를 했더니 즉시 두 형이 와 주었다. 오노()선생과 오카모토(˪) 보모, 마츠다()군이 식사에 동참 두 형을 예배당에 안내.

828

 두 형(미츠이, 코지마)은 식사를 카나리아사에서 하고, 나는 식후에 두 형들과 함께 산책. 돌아오니까 아케보노()교회(프로테스탄트)의 위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나리아 1호실에서 환영회.

 830

 5시경이었을까? 야스()씨라는 분이 두 형이 갑자기 오늘밤에 떠난다고 한다. 나가 보니 두 형은 소독장(Ը) 부근에서 짐을 찾는 중이었다. 여섯시 반쯤 두 형은 수용장소를 떠나셨다. 몹시 갑작스러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안에는 많은 환송객들이 나와 있었다.

 

 미츠이(߲)가 나가시마에 와 있었을 때 소록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소록도자혜의원의 3대 원장인 야자와 슌이치로()826일부로 [의원면직()]된 것이다. 야자와()는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인 인물이었다. 대신하여 경기도 경무위생과장 스호오()가 소록도자혜의원의 4대 원장에 임명되었다. 미츠이, 코지마 두 사람이 830일날 갑자기 나가시마를 출발하여 소록도로 돌아간 것은 야자와 원장의 의원면직 통지를 받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193467, 소록도성결교회는 소록도기독교회와 개칭, 조직도 정비되었다. 스호오()가 부임하고부터 시작된 기독교 탄압에 대해, 미츠이는 환자들의 대변자로서 나섰지만, 결국은 병원당국으로부터 노골적인 기피를 당함으로서 1935816일부로 귀국해 버린다. 김계화는 {성서조선} 82호의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816일 오후, 형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인상깊고, 추억이 서린 한 많은 9년 간의 직장이자 삶터이며, 아니 청춘까지 다 바친 이 섬을 등뒤로 수평선상으로 사라진 형의 그림자를 바라 본 저는, 쓸쓸한 해안, 파도치는 해안을 힘없이 걸으며 애달픈 눈물을 흘린 그 날이 제 일생을 통해 가장 잊을 수 없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무라이 형, 당신이 떠나신 그 날 저녁, 우리들 재원자() 일동의 눈물은 물론, 남생리 앞 바다의 파도소리 마저도 형과의 헤어짐을 애도하듯 슬프게 들리기만 했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안될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귀국하셨지만, 형의 정신과 심금()만은 지금도 소록도를 방황하고 있음을 압니다.

 

 소록도를 떠난 3일 후인 819, 미츠이(߲)는 나가시마 애생원에 입원했다. 소록도에서 나가시마로 직행한 것이리라. 나가시마 애생원이 작성한 [사망자·퇴원자 카드철)]2호에는 [입원번호 11407, 소화10(1935) 819일 입원, 미츠이 테루이치(߲)(동경부), 명치341125일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머리를 짧게 깎고, 흰색 화복()에 검은테 안경을 쓴 작은 몸집의 미츠이(߲)의 사진이 붙어 있다. 마찬가지로 나가시마 애생원의 배급대장의 {가나다 인명부(1931-40)}에는, [입원번호 1494, 미츠이 테루이치, 사적() 세키세이4, (바뀌어), 청산료(ߣ), 입원 10. 8. 20, 34, 퇴원 12. 4.22]로 되어있다.

 미츠이는 19358월부터 374월까지의 18개월 동안 나가시마 애생원에 입원하고 있었으며 입원했을 때의 연령은 35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애생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에 인권옹호투쟁인 [나가시마 사건]이 발생하나, 그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한다.

 미츠이가 입원한 날로부터 10수일이 지난 193596일 밤, 미야카와() [미츠이 테루히코 일담(߲)]이라는 제목으로 소록도의 실정을 기록해 둔 메모가 현재 애생원의 카미야() 서고에 남아 있다. 400자 원고지 2장에, 미츠이(߲)의 이야기를 듣고 속기()한 미야카와의 펜글씨 메모이다. 그 중에서 흥미있는 부분을 골라 소개한다.

 

  환자수                            구본관 400, 북병사 400(700명 수용가능), 동병사 1,000

                            남병사 400, 동서병사 200, 동서병사 200,

                            중병사 1,500(2,000명 수용가능), 4,100.

  형무소                            200명 현재 건설중

  음식                  3합·보리3  68일만에 배급

  예배당               200. 2,000. 벽돌조. 3년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는 인부들의 이야기

  벽돌공장           2인 환자 1800, 18(), 건강자 11,000

  3대문제            1. 직원과 환자의 알력. 이전 원장과 지금은 전혀 틀림. 전에는 심복()

                             [환자 있은 다음에 병원]이라고. 좌담회에의 출석도 중단되기 일수.

                             심경변화. 미츠이(߲) 중상(߿), 간호장의 압제(), 채찍,

                             최근에는 야다()선생(목사)도 사의()할 뜻을 비침

                            2. 치료문제. 최근 치료를 받지 못해 죽은 자가 수명. 인후협착()                                   로 죽은 자 있음. 4개월이나 있으며 한번도 진찰을 받지 못해. 야간진료에는 단                   한번도 온 적이 없음. 의원()들은 와서 도장만 찍을 뿐, 그 뒤는 간호부, 간호                  사가 대진().

                            3. 남녀문제. 이전에는 엄중했으나 대수용()과 함께 2백쌍 이상의 내연자(Ү                         )들이 온 관계로 최근 급격한 반동이 왔다. 40명의 어린이.

                             빈대. 독가스로 죽지 않음

 

 [미츠이 테루히코 일담(߲)]의 미야카와 메모는 마지막에 당시 건설 중이던 소록도갱생원의 시설배치 약도가 그려져 있다. 중앙진료소와 중증자 병동의 서쪽에 [세탁장, 목욕탕, 취사장]이 각 1동씩 서 있고, 다시 그 서쪽으로 [감금실] [정신병실]이 각 1동 늘어서 있다. 193510월에 완료한 제1기 확장공사에서 이미 소록도에는 형무소와 함께 [감금실] [정신병실]의 별동(ܬ)이 건설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심전황씨의 {아으 70}에 의하면 [목욕탕 앞에 붉은 벽돌로 높은 담을 두른 감금실도 만들었다. 쌍방(۰)에 철조망을 부착하여 15칸의 감방을 설치했으며일제의 형무소의 감방과 같은 구조였다]

 미츠이(߲)가 나가시마 애생원에 입원해 1년이 지난 19368월에 나가시마 사건이 일어났다. () 당국이 작성한 {나가시마()애생원 환자소요사건 전말서}를 보면, 키모토(), 아키야마(ߣ), 김원석() 29명과 함께, 미츠이도 자치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있다. 미츠이는 입원환자로서 환자의 입장에 서서 입원자의 [생명]과 생활을 지키기 위해 항의집회에 참가하고, 단식투쟁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사건이 끝난 뒤 원() 당국은 [사상적, 폭력적 주모자]로서 100명 정도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경계했다. 그 가운데 미츠이의 이름도 있었다고 한다. 다음해인 1937422, 미츠이는 나가시마 애생원을 떠나는데, 그 후의 미츠이의 발자취는 분명치 않아서 알 수가 없다.

 8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오구라 켄지((뒤에 나가시마 애생원의 목사)가 쓴 {세토()의 여명(٥)}(1959)에 의하면, 미츠이는 대만(ؽ) 낙생원()에 입원해 환자대표를 역임하는 등 신앙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패전 말기인 1945, 미츠이는 영양실조에서 온 신장염에 걸려, 온몸이 고무공처럼 부푼 채 병상에 누어, 구우()인 오구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거()했다. 44세였다.

 미츠이(߲)의 영혼은 [예수 사랑 하심은]의 노랫소리를 진정 듣고 있었던 것일까?

 

 


I 격리정책의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