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지배와 한센병 


2 불황 속의 소록도 자혜의원

                            3대 원장 야자와 슌이치로()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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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 시정() 20]을 겸해서 1929912일부터 50일간 조선박람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하는 월간지 {조선} 173호는 [조선박람회 개설기념호]라는 부제의 특집(358)을 동년 10월에 발행했다. 그리고 사이토() 조선총독을 비롯한 정무총감과 총독부의 각 국장, 각 도지사 등이 각 행정의 회고와 현황, 전망 등에 관한 글을 싣고 있다. 총독부 경무국장 아사리(߲) [조선의 경찰과 위생]이라는 제목의 글 속의 [나환자의 요양에 관한 문제]라는 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의 나환자는 최근 조사에 따르면 병상(ܻ)이 현저한 자들만도 5,400여명에 달하며 그 실제의 나환자는 훨씬 많은 숫자에 달할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략) 본부(ݤ)는 소록도자혜의원을 확장하여 환자 1,000명을 수용할 계획을 세워, 우선 대정()15년에 그 소요부지 약 28정보를 매수하였고, 소화()2-3년의 2년 간에 환자 500명의 증원수용을 위한 신축을 결정하여, 금년도부터 환자 750명을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록도에 1,000명을 수용한 이후, 다시 그 외에 2,000명을 수용할 설비를 갖춤으로서 본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pp.64-65). 

 

 아사리(߲) 경무국장의 [조선의 경찰과 위생]이라는 글이 월간 {조선}에 발표된 192910, 소록도자혜의원의 하나이 원장은 동도()에서 병사했다. 같은 달 24, 뉴욕의 주가(ʤ)가 대폭락하여 세계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조선도 심각한 불황에 빠져들게 된다.

 소록도자혜의원의 제3대 원장으로 야자와()에게 사령장이 나간 것은 19291228일이다. 야자와는 원래 큐우슈우()에서 피부과인 [야자와()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민간의사이다. 소록도자혜의원의 초대원장인 아리카와()와 제2대 원장 하나이()가 모두 육군군의였으며, 후임인 4대원장 스호오()와 제5대원장 니시키(߲Ф)가 둘 다 조선총독부의 의무·위생담당의 고급관료이던 것과 달리 [민간인] 야자와()는 이색적이다.

 {조선총독부관보} [서임() 및 사령(ֵ)]의 난을 보면, 총독부 자혜의원에 임명된 야자와는 [고등관4]에 서훈()되어 3급봉() [하사]받고 있다. [5위훈5(߲]이라는 위계는 없으며 이 점이 다른 네 사람의 원장과 다른 점이다. 야자와()가 원장이 될 때까지를 {일본MTL}20(193210) [잊을 수 없는 형제]라는 제목의 글에서 하야시()는 소록도를 방문한 추억으로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중증 병동에 N군을 방문했다

 N군은 큐우슈우(). 이 곳(소록도)의 야자와()원장도 과거 몇 년 동안 큐우슈우의 F()에서 개업하고 있었다. 피부과를 개업하고 있었던 관계상 오랜 진료생활 중 몇 사람의 나병환자도 진찰한 적이 있었다. N군도 사실은 그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야자와 병원에 다닐 때의 야자와씨의 친절을 잊을 수가 없었다. (중략) 야자와씨가 하나이씨의 뒤를 이어 소록도병원장이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N군은 몹시 기뻐했을 것이다.

 {신임 원장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예전에 선생님의 진찰을 받은 N이라는 사람입니다}라고 담당자에게 신청했다. 야자와 원장은 곧 이 병사를 찾아왔다. (중략) 거기에는 중증의 눈먼 나환자가 미소를 띄우면서 원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해버린 얼굴에서 예전에 야자와씨를 찾아왔던 젊고 건강했던 나환자의 얼굴모습이 점차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N!][야자와 선생님!] 야자와씨와 N의 마비된 손이 힘차게 맞잡았다. 두 사람은 무량한 감개에 빠져들어](p.2)

 

 문장의 앞 부분에서 총독부 경무국장 아사리()가 말한 [소록도에 1,000명을 수용한 이후, 다시 그 외에 2천명을 수용할 설비를 갖춤으로서 본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라는 말은, 당초에는 완전한 공수표()였다.

 다음에 제시하는 2개의 표를 봐 주기 바란다(-16, -17).

    ()

1927

1928

1929

1930

1931

1932

1933

1934

1935

 

환자정원수

250

450

750

750

750

770

1,270

2,770

3,770

 

현재 인원

250

443

745

745

765

790

1,212

2,198

3,733

 

건 평()

733

1,266

1,360

2,048

20,48

2,049

4,495

27,243

34,119

 

 

 1929년에서 1933년까지가 야자와() 원장시대

 

   

경상부(ݻ) 결산액

약품, 치료재료 결산액

 식비 결산액

 피복비 결산액

금액()

11일당

금액()

11일당

금액()

11일당

금액()

11일당

 

1927년도

56,641

62.6

4,581

05.0

18,113

20.1

2,270

02.5

 

1928년도

88,502

74.1

8,403

07.1

22,994

19.3

5,538

04.6

 

1929년도

148,783

73.2

13,354

06.6

40,367

19.8

8,704

04.2

 

1930년도

143,854

53.1

12,767

04.7

44,145

16.3

7,481

02.8

 

1931년도

125,664

45.5

10,805

03.9

26,061

09.5

4,732

01.7

 

평 균

112,689

61.7

9,982

05.5

30,336

17.0

5,765

03.2

 

  (비고) 1931년도의 식비결산액이 현저히 감소한 것은 상당히 많은 양의 식량 이월이 있었기 때문임.

  

경상부(ݻ) 결산액

약품, 치료재료 결산액

 식비 결산액

 피복비 결산액

1/1()

비 율

1/1()

비 율

1/1()

비 율

1/1()

비 율

 

1927년도

62.6

0.86

05.5

0.76

20.1

1.02

02.5

0.60

 

1928년도

74.1

1.01

07.1

1.08

19.3

0.97

04.6

1.10

 

1929년도

73.2

1.00

06.6

1.00

19.8

1.00

04.2

1.00

 

1930년도

53.1

0.73

04.7

0.71

16.3

0.82

02.8

0.67

 

1931년도

45.5

0.62

03.9

0.59

09.5

0.48

01.7

0.40

 

평 균

61.7

0.84

05.5

0.83

17.0

.086

03.2

0.76

 

 야자와() 원장 재임 중인 1930년도부터 1932년도의 3년간, 환자정원은 750명이 20명 증원되어 770명이 된 것뿐, 소록도자혜의원의 경상부(ݻ) 결산액, 약품 및 치료재료 결산액 등도 1929년에 비해 야자와 원장시대에는 감소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로 수용환자 1인당 경비도 극단적으로 감소했다. (-16)을 바탕으로 1일당 한사람의 금액을, 1929년도를 1.00으로 하여 각 연도별 금액의 비율을 산정한 것이 (-17)이다.

 조선이 불황에 휩싸인 1930년 이후는, 마침 그 시기는 야자와 원장 시대와 겹치나, (-17)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록도자혜의원에 수용된 조선인 한센병환자의 생활은 극도로 저하하고 있다. 경상부 결산액, 약품 및 치료재료 결산액, 식비 결산액, 피복비 결산액의 수용환자의 1인당 하루의 비율은 1929년을 1.00으로 할 경우, 1930년도는 각 항목 모두 약 7, 1931년도는 실로 5할 가까이 감소하고 있다. 장기적인 불황과 식민지지배의 강화는 조선경제를 악화시켰으며 그에 따라 부랑하는 한센병환자의 수를 격증시켰다

 앞서 소개한 {일본MTL}20(193210월호)에 야자와() 원장은 [조선의 나()문제]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기고하고 있다

 

 별 항에 있는 바와 같이 우리 조선내의 부랑 나환자의 실수()는 놀랄 만큼 많아, 이들 환경으로부터 혐기()당한 불쌍한 나환자들은 저쪽 길에서 쫓기고 이쪽 마을에서 거절당하여 다리 밑에서 자고 산자락에 모여, 때로는 삼삼오오 벽지()에 부락을 형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를 형성하여 이동하면서 촌락이나 도회에 들어가서 걸식생활로부터 강청강박(˭˭)에 이르기까지그야말로 전국 지방관헌들도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태이다.

 우리들은 이전부터 반복해서 조선내의 구라(ϭ)문제는 우선 이 부랑환자들의 일소()에 있다고 강조해 왔으며, 이러한 문제가 선결(̽)되지 않는 한, 나예방법 적용과 같은 것도 전혀 무의미하다는 의견도 지당한 것이다. 여전히 조선 내 나환자의 구호(ϭ)상태는 진보를 인정할 수 없는 실상이며, 이것이 국가재정상의 관계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본인으로서는 유감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p.1).

 

 소록도자혜의원장으로서 총독부의 동 병원에 대한 경비가 대폭 삭감된 사정을 위의 통계와 문장을 통해서 설명한 것이다. 그 당시 일본국내에서도 수용된 한센병환자에 대한 국가예산은 적었다. 나가시마 애생원의 경우, 19313월에 전생()병원으로부터의 개척환자 81명과 도중 수용의 4명이 동시에 해로()로 나가시마에 상륙, 초기 입원자가 되었으며, 8월에는 입원자가 400명을 돌파했다. 그 해 12, 나가시마 애생원의 미츠다() 원장은 환자들의 주택부족을 호소하여 10평 주택운동을 시작했다. 10평 주택운동이란 건축자금을 행정예산으로부터가 아니라 민간기부에서 구해, 환자의 작업으로 환자주택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기부접수의 시작은 193111월이며 주택 준공 제1호는 1932519일 나가시마 애생원 위안회 10평주택 [자강료(˪)]준공이었다(나가시마 애생원 {소화()10년 년보} p.6).

 전술한 야자와() 원장이 [조선의 나()문제]라는 제목으로 193210월에 발표한 문장은 나가시마 애생원에서 시작된 10평 주택운동의 전례에 따라, 민간의 기부금으로 한센병요양소의 확장·증설공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작년 희망사()에서 전 조선의 사원 제군들로부터 2천여원을 거출하여, 2동의 병동을 본 병원에 기증한 것은 참으로 특필해야 할 미거(ڸ)로서 깊이 감사드리는 바이다. 우리들도 원() 경제가 허용하는 한, 한 명이라도 많은 정원 외의 증가수용을 할 예정이며, 나가시마의 선례에 따라 자혜병사 건설계획을 세우고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요양소의 확장, 증설이 실로 목하()의 급무이다(p.1).

 

 이어서 야자와() 원장은 요양소 내의 제반시설도 일본국내와 조선을 비교하여 [그 차이가 너무 심한 감이 있다]면서, 일본국내의 선각자 여러분들은 [크게 이 점에 유의하여 연구하여, 강력하게 지원해 줄 것을 갈망하는 바이다(7.8.9)]라고 쓰고 있다.

 (7.8.9)란 소화7(1932) 89일의 의미이다. 야자와 원장이 [희망사에서 2천여원을 거출]이라고 한 것은 다음을 사실을 가리킨다. 19313월까지 [경성제국대학 총장]으로 조선 한센병환자의 격리수용을 주장하고 있던 시가(̾)는 당시 [희망사 경성연맹 주사()]를 맡고 있었으며, 1931914일 소록도자혜의원을 방문하여 거금() 2,000여원을 기부한 것이다. [일반사회의 동정()]에 의지하여 환자의 증가수용을 꾀하려 하는 야자와 원장의 의향을 엿볼 수 있다. 다음 자료는, 희망사 기증금에 관계되는 {소화()6년 소록도자혜의원연보}(1931)의 기술내용이다

 

 () 구제사업에 대한 조선 내에서의 일반사회의 인식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실로 기뻐해야 할 현상으로, 금년중 본원()이 전 조선에서 접수한 동정()은 희망사 경성연맹의 기증이 가장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조선 내 각지의 동() 지부로부터의 거금() 2,000여원으로 본원 내 남북 양() 병독지대에 새롭게 각 1725작의 병동 1동을 건설, 기증한 것으로, 이에 희망병동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여 소화()7년도부터 환자 20여명을 증가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p.17-18).

 

 야자와() 원장 재직중의 193112월말 현재의 [입원환자 도별표] [입원환자의 입원전의 직업별표](p.22-23)를 살펴보기로 하자.

 (-18)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소록도자혜의원에 수용된 한센병환자 764명중의 98%을 점하는 750명이 전라양도(Գ)와 경상양도(Գ)의 사람들이다.

   도별

전남

전북

경남

경북

강원

충남

충북

경기

함남

함북

평북

268

30

146

117

-

4

2

1

2

2

1

573

79

7

62

41

1

1

-

-

-

-

-

191

347

37

208

158

1

5

2

1

2

2

1

764

 

 [나병자에 대한 불안, 경북당국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19312월의 {조선일보}사설은 다음과 같은 논설을 게재하고 있다.({조선통신} 1469, 1931210일부에서 재인용)

 

 나병환자는 남조선 지방에 가장 많으나, 그 중에서도 경상북도의 관내에는 2,600여명의 환자가 있으니, 그에 따른 도민(Գ)들의 불안의 정도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2,600여명이라는 통계숫자도 표면에 나타난 나병환자만을 조사한 것으로, 숨어 있는 환자들은 지극히 조사하기가 어려워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를 포함한다면 혹은 그 배수()에 달할 지도 모른다. 우선 그 통계만을 보더라고 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자는 불과 405명에 불과하며, 기타는 거주()를 가진다고는 하지만 의료를 단념한 자가 거의 대부분으로 600여명은 가두를 방황하고 있는 자들이라 한다. 만일 이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도 당국의 위생행정상의 실태()는 문자 그대로 명백하다는 점을 지적해 둔다({조선사상통신} 21권 경인문화사, 1989, p.58).

 

 다음으로 동() 의원에 수용된 환자들의 수용전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음의 (-19)를 통해 살펴보자.

직업별

농 업

어 업

건물상(ڪ)

잡화행상

교 사

목 수

음 식 점

보통학교 아동

무 직

합 계

533

1

2

12

3

1

2

11

8

573

96

3

-

-

-

-

6

5

81

191

629

4

2

12

3

1

8

16

89

764

 (-19)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수용 전의 환자직업은 환자수 764명 가운데 농업이 629명으로 가장 많아 전체의 82%를 차지하고 있다. 한센병환자 중에 16명의 [보통학교 아동]3명의 교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병원 내의 남북 양 병동에 보통학교(초등학교)의 교과서를 사용하여 환자 중에서 학식 있는 자를 골라 교육을 실시하여 [목하 그 생도수 193명에 이른다]고 전술() {소록도자혜의원 연보}에 기술되어 있다(p.20).

 

 이 시대에는 소록도자혜의원에 수용한 한센병환자 이외에도, 의원에서는 [외래환자의 진료]를 행하고 있었다. 전게(̩) {연보}에는 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당원()은 벽지()에 편재하여 부근 일대에 의료기관이 부족하기 때문에 본래의 나() 구료(ϴ)사업 이외에 일반 외래환자의 진찰에도 종사하며, 이를 보통 및 시료()로 구분하여 매일 건강지대 내의 진료소에서 진찰하고 있으며, 통원 환자는 하루 평균 21명으로 중증자는 입원가료하게 된다. 그리고 원무()에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 왕진의 수요에도 응하고 있으며 금년 중의 왕진회수는 18회에 이른다(p.12).

 

 19321223,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이마이다(), 동 경무국장 이케다(), 동 경무국 위생과장 니시키(߲Ф), 동 학무국장 하야시()4명은 [조선나예방협회 설립위원 대표]로서 재단법인 설립의 허가를 조선총독에게 출원하고, 동년 1227일 그 허가를 얻음으로서 조선나예방협회가 설립되게 된다. 일본 식민지 지배하의 조선의 [()]정책은 이를 계기에 크게 변모한다. 야자와()가 소록도자혜의원장에 임명된 지 정확하게 3년이 지난 때이다. 야자와는 그 뒤에도 잠시 원장을 역임했으나, 다음해인 1933826일에 면직됨으로서 소록도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