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지배와 한센병 


3 조선나예방협회의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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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3, 조선 남부의 각지를 시찰 중에 있던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아리요시()가 같은 달 29일 부산에 와서 [나환자 구제는 경비(ި)가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담화한 사실을 {오오사카 아사히신문·조선판}(192443)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조선의 나병환자 구제책은 일찍부터 골치를 앓고 있던 문제로, 물론 전남의 관립 나병원을 비롯하여 전 조선에 있는 선교사가 경영하는 3개소의 수용소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만큼의 원조는 하고 있으나, 이의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도저히 지금과 같은 설비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물론 이것도 경비의 문제로 지금 바로 해결할 수는 없다. 부산의 멕켄지씨와 같은 경우도 다대()한 희생을 하고 있다고 하니 금후 가능한 한 원조할 예정이나, 어쨌든 이미 내지(Ү)에서 조차 나병환자의 보호방법은 실로 불완전한 것으로, 이를 일석일조에 희망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운운(부산).

 

 실제로 이 아리요시() 정무총감의 담화가 있은 2년 뒤인 1926년의 한센병환자 수용인원의 현황을 보면, 기독교 의료선교사가 경영하는 광주, 부산, 대구의 세 요양소의 합계가 1847명임에 대해, 관립의 한센병요양소인 전라남도 소록도자혜의원의 수용환자수는 불과 249명에 불과하다. 그것도 수용환자의 정원은 불과 125명으로, 정원을 124명이나 초과하는 2배가 넘는 과잉수용이었다.

 관립 소록도자혜의원의 한센병환자 수용은 1916년에 시작되었으나 거의 흉내만 낸 것이었을 뿐, 그 대부분은 기독교 의료선교사들이 경영하는 사립요양소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이들 사립 한센병요양소는 기본적으로 해외의 구라(ϭ) 선교회로부터 보내오는 자금으로 운영되었으며, 1923년부터는 매년 조선총독부에서 경비를 보조받고 있었다.

 1920년대 중엽의 한센병환자 수용요양소의 수용인원은 사립·관립을 통틀어 2,000여명에 불과했다. 수용을 거절당한 환자들은 집단적으로 부락을 형성하고, 상호부조회를 조직하여 총독부 등 행정에 대한 요구활동을 했다. 이에 관한 당시 조선의 신문기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경북달성에 나병환자 상조회/병 치료와 전염예방이 목적/전 조선에 환자가 2만여명

 조선에는 2만여명의 문둥병 환자가 있어서그들을 구제하는 기관으로서는 외국사람이 경영하는 광주, 대구, 부산에 있는 [나병환자 수용소] 세 곳과 총독부에서 경영하는 소록도의 [수용소]가 한 군데 있어 1천여명의 환자를 수용하고 있으나, 그 외 19천여명의 환자는 어찌할 길이 없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되 그들을 구제코저 하는 사람은 별로히 없다. 이에 그 문둥병 환자들은 자기들이 자기들 끼리로 단결하야 가지고 무삼 살길을 찾고저 요사히 대구 나병환자 상조회라는 것을 설립하였다 한다. 그들은 서로 돈을 모아 가지고 치료를 통일하며 또는 서로 돕고 서로 붙들며 무삼 광명한 길을 찾고저 애쓰는 동시에 행동을 삼가서 남에게 전염되지 아니하게 하고저 하는 중인데현재 직원으로는 회장·총무·회계 등 5, 6인이 있는데 회무()가 발전됨에 따라 장래에는 조선 각지에 지부를 설립하고 병 치료와 전염예방에 힘쓸 터이라더라.({동아일보} 19231231). 

 

나병환자가 1개 부락을 만들어/달성군 달서면에

 대구에는 외국인의 경영이기는 하지만 자선 나병원이 있으므로 각지에서 동()병 환자가 내집()하나 이들을 수용할 능력이 심히 부족하므로 목하() 5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병동을 건축 중에 있다. 이 병원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환자들은 달성군 달서면에 150명이 집단으로 부락을 만들고 있는데 남녀동거이므로 아이들은 태어나 혈통환자는 자꾸만 증가할 뿐이므로 대구서()는 원적지에 송환할 방침을 취하고 있다(대구)(오오사카 아사히신문·조선판, 1924527). 

 

나환자가 모여든다/부산의 고민

 부산의 조선인 나병환자들이 상호부조회를 조직하여 전 조선 각지의 부조회와 연락하여 치료계, 외교부, 회계부 등을 마련하고 치료를 주로 하는 집단적 공동생활을 경영하려는 계획 중에 있었으나, 최근 선전부가 맹렬히 시골지방에 선전한 까닭에 많은 나환자들이 부산에 몰려들어, 이미 동래군 서면에 150명의 환자가 일개 부락을 만들어 매일 부산 부내(ݤҮ)로 걸식행각에 나서기 때문에 당국도 당황하고 있으나 해산을 명령할 수도 없고, 다가오는 여름철 추체()들이 때를 지어 배회하는 것은 위생상에도 좋지 않으므로 방임할 수도 없어, 목하 그 구제책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오오사카 아사히신문·조선판, 1926626). 

 

나병환자가 보조()를 간원()/사이토() 총독 앞으로

 경남 동래군 서면 호곡리의 나병환자 상조회원 130명의 대표 김경사()14일 사이토()총독 앞으로 우리들 상조회원은 최근 약품이 비싸져서 치료를 할 수 없어 보기에도 딱한 형편이 되고 말았으니, 이 기회에 우리들을 위해 1년 간의 치료비 6,416원을 보조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 집단은 외국인이 경영하는 병원에 들어가 치료받기 위해 찾아왔으나 병원이 만원(ػ)이므로 그 결원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중이나, 인근 사람들로부터는 압박을 받고 한편으로는 치료비도 없는데 약품 값은 비싸지기만 하여 상당히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경성(오오사카 아사히신문·조선판, 19261016).  

 

동래()에 모여드는 나환자 무리/상조회를 조직하여 공산적 생활/상조금 교부는 각하

 경남 동래군 서면 호곡리에는 2, 3년 전부터 조선인 나환자들이 부락을 만든 뒤 해마다 그 수가 늘어, 현재는 130여명에 이르며 그 대부분이 부산 부내(ݤҮ)에 들어와 걸식행각을 벌이므로 부민(ݤ)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불평을 하는 자들이 있으나, 그들 사이에는 이미 작년 중반쯤 상조회를 조직하여 스무 채의 가옥까지 건축하여 일인당 한 달에 20전의 회비를 거두어 이로써 중환자의 식비 및 의약료에 충당하는 공산촌적(ߧ)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마을의 촌장 격인 김경화()라는 남자가 이번 본부(ݤ)에 대해 연액 6,400원의 보조를 신청해 왔기에 본도(Գ) 위생과에서 조사중이나 당국의 방침으로서는 상기 보조는 필요치 않다고 결정하여 그 취지를 본부에 회답함과 동시에 신청자에게도 이를 통달(ӹ)했으나, 그렇다고 버려 둘 수도 없어 목하 구제책에 대해 부심(ݯ)하고 있다고부산(오오사카 아사히신문, 조선판, 1926122). 

 

광주 나병공제회 진정()/여생()의 구제를 애원()

 광주 양촌리 나병원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주관하고 있었으나, 이번 봄 동() 병원을 여수로 이전함에 있어, 지금까지 수용되어 있던 수 백명 중 현재 광주에 잔존하는 자들은 수용인원 관계상 수용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이 미수용자들만의 조선나환자 공제회를 조직하여 유리걸식()하는 환자들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자작자급할 수 있을 만큼의 농업을 경영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사회 측에 대해 동정을 구함과 동시에 전남지사 및 조선총독에게 진정서를 제출했다고 하는데, 그 진정 내용은 실로 눈물겨운 것으로 전 조선에 있는 2만여 환자들이 독점거주할 수 있는 특수지역을 하부(ݾ)하여 농업에 종사토록 해줄 것을 탄원한 것이라고(중외)(1928627, {조선사상통신} 690).

 

 3.1독립운동 다음해인 19204월에 [민족신문]으로 창간된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의 한센병환자에 대한 시책에 대해 어떠한 논설을 썼을까?

 동사()1913426일자 [사설] [나병자 구제에 대하여]라는 사설을 통해 그 필요성을 논하고, 1923726일에는 [나병자와 몰핀 중독자에 대해 무성의한 당국의 태도]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총독부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1924326일에는 [월요란(ձ)]으로 통영() 해동병원의 김상용()의 기사를 싣고, 그 속에서 [나병자 상조회의 창립을 축하하며, () 상조회의 장래발전과 충실을 축복한다]고 말하고 있다.

 1925524일에는 [다시 한번 나병자에 대한 시설에 관해, 당국과 일반사회의 주의를 환기한다]라는 [사설]을 게재하고, 1927119일에는 [대구 나병환자 상조회]의 구제에 관해 총독부에 진정한 것을 보도했으며, 1928614일에는 [나병환자의 구제문제] [사설]로 게재하고 있다. 이러한 조선 한센병에 대한 사회적인 동향 가운데 조선나병 근절책연구회가 설립된 것이다

 대한나관리협회 발행 {한국나병사}(1988)81쪽에는 동 연구회의 설립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나라의 선각자들은 일제의 침략에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면서도 외국인의 손에 의해서만 행해지고 있는 구라(ϭ)사업에 민족자존의 눈길을 돌려 192846, 한국최초의 민간 구라단체인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를 탄생시켰다. 당시 여수에서 윌슨과 더불어 구라사업에 몸담고 있던 최흥종()은 우리나라 나환자는 우리 손으로 보살피고 구제해야 한다는 각성()하에 전국적인 구라기관의 설립을 추진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를 발기(ۡ)한 최흥종은 윌슨과 더불어 경성(서울)에 올라와 지도급 인사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이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힘의 규합을 호소하였다. 이러한 최흥종의 노력으로 규합된 동지 38명은 취지문을 채택, 공포하고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를 발족시켰는데, 조선일보 주필 안재홍()이 기초()한 이 때의 취지문은 민족의 자존과 독립정신을 담고 있다.

 {한국나병사}에서는 동()연구회의 창설을 192846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동아일보}를 보면 1931924일에 [사회유지들의 발기로 조선나환자 구제연구회]가 서울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되어({동아일보} 1931926일자), 또 동 나병구제회 위원회가 같은 달 28일 개최되어 집행위원장에 윤치호(), 상무위원에 최흥종이 선출되었다고 되어 있어 {한국나병사}의 기술과는 다르다.

 다음해인 1932126일자의 {동아일보}에는 [나병근절회 장정()의 취지/수만 매를 인쇄분포]라는 표제로 조선나병근절책 연구회의 [근절책연구회 장정()]이라 하여 [근절책연구회 취지]를 게재하고 있다. ()회의 [취지]의 일절을 {한국나병사}로부터 소개한다.

 

 [인류애의 지극한 충동에서와 그리고 민족보건의 간절한 요구에서 우리들은 조선나병환자의 구제와 그 예방사업을 확립하기를 열렬히 주장한다. 나병의 절대근절이 필요한 만큼, 나병을 절대격리 하는 것은 일일()이라도 지완()할 수 없는 시급한 문제이다. 그런데 격리하는데는 그 안전과 위안 및 의료가 없을 수 없으니 차()는 예방과 구제가 둘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이유이다. 조선의 나병환자는 지금 16천을 계(ͪ)한다. 30년전 지소수()에 비하여 30년후 금일()에 여사()히 증가된 것이 이에 놀라운 사()이어든 삼남(߲) 각지로부터 북선()에까지 퍼져가는 병마의 발호(ۢ)는 실로 전 민족의 생명을 녹여 내려하고 구제되지 아니한 나병자들의 그지없는 방랑은 사회풍토와 민중보건상 더 할 수 없는 위협이 되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외국선교회 및 위정 당국의 시설까지의 수용과 구제가 2,500명에 불만(ػ)하니 그 의료와 예방의 부족함이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격리의 취지는 타()에 재()치 아니하니 교통과 접촉과 매개로써 병균의 번식을 근절하자 함이 유일의 목적이오 이 때문에는 기후와 물산(ڪߧ)이 적당한 격리도(̰)의 선택과 농예와 공작으로 그 생활을 자급()하고 그 위안을 주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다.

 나병자 구제의 사업은 차등()을 실현함으로써 그 취지를 관철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는 내외 각계의 온갖 지지와 조력()을 요()할 바이오. 또는 유식자와 독지가의 공사() 각계의 합작()을 기하는 바이다. 인도(Գ)의 대의는 모든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천하의 혈성()있는 사녀(ҳ)들은 어찌 성()과 역()을 모으지 아니하랴! 민중보건에로! 할 수 있는 역량을 집중하자!](p.81-82).

 

 이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이 들고 발족한 민간구라운동는,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없어 좌초하고 말았다. 이 모금을 방해한 것은 조선총독부에 의한 탄압이었다. 총독부는 조선민족이 수립한 조선나병 근절책연구회에 압박을 가해가면서, 한편으로는 관제(ί) [조선 나예방협회]를 설립했다.

 {동아일보}가 조선나병 근절책연구회의 [장정()] [취지]를 게재한 1개월 후인 1932227, {오오사카 아사히신문·조선판} [나병예방협회 설치를 결정/본부를 총독부에, 각도(Գ)에 지부]라는 표제아래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경성()나병예방협회의 설립에 관해서는 이미 총독부 위생과에서 구체안을 고구(ϼ)중에 있었으나, 이번에 성안()을 얻어 드디어 설치하게 되었으며 곧 취지서를 일반에게 배포하여 회원모집에 착수하게 되었다. ()의 내용은

 협회본부를 총독부 내에 두고 각 도에 지부를 마련하여 회장에게는 정무총감, 부회장에게는 경무국장 또는 지부장에는 각 도지사를 추천하고, 전 조선으로부터 대대적으로 회원을 모집하여, 이 회비에 의해 기금을 조성하여 나병예방시설을 구축할 방침으로 각 도(Գ)와의 타협이 끝나는 데로 발회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의 나병환자는 현재 14천명의 다수에 이르나, 그 가운데 요양소에 수용되어 있는 자는 불과 2,500명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115백명의 환자는 완전히 방임된 상태로, 그 중에는 각지를 전전 방랑하고 있는 환자가 2천명 정도 있어 위생상뿐만 아니라 인도상(Գ߾)의 중대문제로서 지금까지 종종 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예방협회에서는 우선 제1기 사업으로서 방랑환자 수용의 요양소를 신설하여 그들을 가두(ʶ)로부터 일소()한 뒤, 순차 예방설비를 하여 나병의 철저한 박멸을 꾀할 방침이다.

 

 일본국내에서도 그 전년도인 1931121, [()예방협회]의 창립총회가 개최되고, 318일에는 재단법인으로서 내상(Ү)으로부터 동() 협회는 인가를 받고 있다. 거의 같은 30년대 초두()에 설립된 나()예방협회이지만, 일본국내와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조선에서는, 설립 경과나 모금 등을 포함하는 사업내용에 있어 상당히 다른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그 상이점에 살펴보기로 하자

 일본국내의 나()예방협회의 경우, 황태후 세츠코(, 1951년에 사거하여 테이메이(٥) 황후로 추서됨. 소화()천황의 생모)로부터의 하사금 10만원(1만원씩 10년간)이 동() 협회의 기금에 포함되었고, 국고보조금, 회원의 거금(), 독지가들의 기부금품 등에 의해 운영되었다. 사무소는 내무성 위생국내에 설치되었다.

 회두()에는 전 수상이었던 키요우라(Х), 부회두 겸 이사장에게는 내무차관, 상무이사에는 위생국장과 예방과장이 각각 취임했다. 구체적인 활동내용을 1933년도를 예로 살펴보면, 선전활동 특히 황태후 세츠코() [황은()]의 강조, 한센병에 대한 조사연구활동으로서 학술원조 등이 주된 것이었다

 이에 대해, 19321227일에 재단법인으로서 설립된 조선 나예방협회의 경우는 어떠한가?

 

 조선총독부 협회의 주요임원은 전부 조선총독부의 [고급관료]에 의해서 독점되고 있다. 회장은 정무총감 이마이다(), 부회장 겸 이사장에는 동() 경무국장 이케다(), 상무이사에는 동() 경무국 위생과장 니시키(߲Ф)가 취임했다.

 총독부 내무국장 발신 전라남도 지사 수신의 1933511일부 통첩에 의하면 [도군(Գ) 관리가 당 협회의 위탁에 의해 귀관의 승인을 얻어 출장할 경우특히 이를 묵인해야 함에 유념]하라고 되어 있으며, 지방청 사무비(일반경비)로서 여비 1,500원을 포함하는 1,650원이 예산 증배()되어 있다. 조선 나예방협회는 민간단체의 체재를 갖추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조선총독부의 지배 하에 놓여있던 [어용단체]였다.

 193510월에 발행된 {조선 나예방협회 사업개요}에 의하면, 조선 나예방협회는 [()의 예방 및 구라(ϭ)에 관한 시설을 행하고 그 근절의 도모를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그 목적달성을 위해] 아래 사업을 행한다고 하여 다음 5항목을 제시하고 있다.

 1. ()의 예방 및 구라(ϭ)에 관한 제반사업의 후원 및 연락

 2. ()의 예방 및 구라에 관한 시설

 3. ()의 예방 및 구라에 관한 조사연구 및 선전

 4. 나환자의 위안에 관한 시설

 5. 기타 나 예방에 및 구료(ϴ)에 관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사항(p.3)

 그러나 동 협회의 주된 사업은 총독부의 위탁사업인 나병 근절계획의 수립, 필요한 자금모집 및 소록도자혜의원의 확장공사였다. 물론 동 협회는 이러한 사업을 담당하면서 사업 자체를 관리하는 권한을 가지지 못했으며, 실제로는 조선총독부가 지배, 통제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조선 나예방협회의 수입상황을 하사금(), 국비 및 도(Գ) 보조비, 기부금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황태후가 1933년부터 매년 1만원씩 3개년에 3만원, 이 왕가(ʫ)에서도 매년 2만원씩 계 6만원의 하사금을 거출()했다. 이 금액은 당초의 조선 나예방협회의 총사업비 150여만원에 비해 매우 적은 돈이었음에도 불과하고, 총독부는 소록도 나요양소가 마치 황실과 왕가의 하사금으로 건설된 것처럼 선전했다.

 동 협회의 사업자금의 대부분은 민간으로부터의 기부금에서 조달되어 전체의 75%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경우, 명목상은 기부금이었지만 실제로는 관공리들의 경우 급료로부터 사전 공제를 당했으며, 일반주민에서 학생에 이르기까지 거의 강제적으로 기부금을 제출토록 하였다. 각종 사회단체 및 종교기관에서도 기부행위가 강요되어 해당()모금까지 실시되었다. 1933415, 조선나예방협회의 제1회 평의()위원회가 개최된다. 조선나예방협회 평의회는 평의원 86명 중 56명의 출석을 얻어, 서울의 조선호텔에서 개최되었다. 석상(߾)에서 이사장인 이케다(, 총독부 경무국장)는 사업보고를 하는 중에 다음과 같이 발언하고 있다.

 

 연말의 찬 날씨도 마다치 않고 가두(ʶ)에 서서, 일반 민간의 동정에 호소하여 의연금을 모금하기도 하고, 혹은 음악회를 개최하여 그 순익금()을 기부하기도 하고, 혹은 기독교회에는 다수의 신자에게 권유하여 기부금을 모으기도 하고, 또는 초등학교나 보통학교 학생들이 각자 1, 2전이라고 하는 적은 돈이지만 이를 모아서 기금하기도 했으며, 상상도 하지 못한 형무소에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까지도 각자 5, 10전이라는 돈을 거출하여 기부해 주었습니다.({조선공론} 19335월호).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발행되던 {오오사카·아사히신문·조선판}을 보면, 나예방협회 기금을 다액() 기부한 자에 대해서는 [정부당국에서 시상이 행해졌으며, 1만원 이상의 개인기부자에 대해서는 감수 포장(), () 단체에 대해서는 표창장, 1만원이하 1천원 이상의 기부에 대해서는 금배() 또는 목배() 등을 수여하도록 되어 있다. 1만원 이상의 고액 신청자는 아래의 24명으로](1933108일부)라고 보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협회에 따뜻한 기부금/요정 여주인과 기생/하녀들이 맨 먼저](19321127일부)라든가, [훌륭한 성적/나협()에의 기부금/각 방면에서 응모신청 쇄도/다액 기부 속속](1932123일부) 등의 신문 표제들이 눈에 띈다.

 이처럼 조선총독부의 [권력]은 민간인들의 기부행위를 강요, 실시하는 과정에서 한센병환자 뿐 아니라, 일반 민간인까지를 국가의 사회질서 통제에 끌어넣음으로서 높은 기부비율과 기부금액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짧은 기간에 실행되었다는 점, 도비(Գި) 보조금이라고 하는 지방비가 11.4%에 이르고 있다는 점 등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19319월에 시작되는 중국 동북지역, 즉 소위 만주(ػ)에 대한 침략을 계기로 일본의 군국주의(파시즘)가 한층 더 진행되면서, 조선의 대륙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사회적 동원체제가 구축되고, 그와 관련된 사회적 통제가 행사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국가권력이 조선인 한센병환자를 격리·수용을 전문적으로 담당함에 있어, 그 필요로 하는 막대한 재원을 민간인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나가시마 애생원의 사무관으로 서무과장이었던 요츠야() {애생()}지 제5권 제2(19352월호)의 권두문 [()의 근절과 참전거금운동(]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 나()예방협회가 창립초기에 예정한 기부금은 60만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과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손쉽게 실로 160원의 기부를 얻어낸 사실과, 내지(Ү)의 나예방협회가 창립초기에 예정한 200원의 기부액이 무려 4년이 경과한 오늘날도 불과 그 반액에 불과한 1백여원에 그치고 있다는 사실, 이 양자() 간의 차이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 {국민 열도()의 차이}, 이것 뿐이다]

 

 요츠야() 과장의 말처럼, 양자간의 차이가 [()의 근절]에 대한 {국민 열도의 차이}가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