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지배와 한센병 


4 소록도 자혜의원의 제1기 확장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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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나예방협회의 설립(193212)에 참가하여 소록도자혜의원 확장기본계획의 실무책임자가 된 것은 동() 협회 상무이사며 조선총독부 경무국 위생과장인 니시키(߲Ф)였다

 니시키()) 니시키 산케이(߲Ф)(1884-?) 188412, 오오이타현()에서 태어나 1909년 히로시마현() 니시키 토시사다()의 양자가 된다. 1911년 경도(Դ)대학 의과를 졸업하고 1930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위생과장, 1942년 제5대 소록도갱생원장에 취임, 패전을 맞이한다. 같은 해 귀국하여 전후()에는 후생기관(ί)으로 활약, 쿠류우() 낙천원()의 의무과장에게 취임(19506). 19525월 퇴직전출.

는 히로시마현()의 출신으로 18842월에 태어났다. 1911년 경도제국대학 의과대학 의학과를 졸업, 19146월 카나가와현(ү) 학교의()를 출발점으로 관계(ίͣ)에 투신, 동년 7월에 카나가와현 기사(), 1919년에 방역관(ί), 192110월에는 특허국기사를 겸하고, 2년 뒤 5월에는 내무국기사를 겸임했다. 19244월에 조선총독부 기사가 되어 조선으로 건너와 경무국 위생과에 근무, 19289월 위생과장 사무취급을 거쳐 19304월에 위생과장으로 진급했다

 {오오사카·아사히신문·조선판} [위생과장에게 니시키()씨 취임]이라는 표제 아래

 [니시키() 총독부 위생기사가 이번에 경무국 위생과장으로 취임했다. 위생기사가 과장으로 임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기사로부터 과장으로 승임()하는 길이 열린 것은 일반에게도 호평을 얻고 있다]라고 보도했다(1930415일자).

 

 니시키(߲Ф)는 우선 나환자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확장을 제1차 목표로 사업계획을 수립했는데 이 계획은 다음과 같은 실태를 반영하여 입안된 것이었다. [조선의 나환자는 소화6(1931) 12월말 현재 그 수가 8,031명에 이르며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라고 하여 [사업계획안]에서 다음과 같은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소록도자혜의원과 기타 3개 사립요양소에 수용 치료중인 환자        2,500

 부랑(ݩ)환자                                                                                                  1,500

 무자산(ߧ) 환자                                                                           1,500

 자력()이 있어 당분간 부랑의 우려가 없는 환자                2,531

 합계                                                                                                      8,031

 [따라서 우선 실제로 각지를 방랑, 배회하는 자 1,500명 및 무산자중 부랑의 우려가 있는 자 500명을 더해 약 2천명을 수용할 경우, 부랑배회의 우려가 있는 자 모두를 수용할 수 있으므로 제1기 사업으로서 2천명을 수용하는 데 필요한 토지, 건물 기타의 설비를 정비하여 이를 (조선나예방협회로부터)정부에 기부하는 계획을 세웠다]라고 하며, 1기 계획에 필요한 경비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933년도                                                                34만원

내역 토지매수비                                                                    25만원

환자 400명 수용소 신축비                                                 7만원

환자 400명의 약 5개월간 수용비(직원인건비 포함)      2만원

1934년도                                                                17만원

환자 1,000명 수용소 신축비                                 17만원

1935년도                                                                10만원

환자 600명 수용소 신축비                                                  10만원

                                                                          61만원

 상기(߾)에 대해 국고로부터 약 11만원, 지방비에서 약 17만원, 28만원을 보조받을 예정이므로 약 33만원은 일반 기부에 의한다고 것으로 생각했다(조선총독부 {조선} 212, 19331월호, pp.195-196).

 

 이상이 조선나예방협회의 당초 계획안이나, 19332월하순 조선총독부(나예방협회)에서 대규모의 [나환자 일제조사]를 실시한 결과, 관사립 나요양소에 수용 중인 3,461명을 제외하고도 9,659, 양자를 합하면 13,120인에 달하고, 부랑환자만도 2461명에 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73회 제국의회 설명자료](1937)에 의하면 1936년말 현재의 나환자는 수용환자가 관립 3,838, 사립2,007, 미수용 환자 7,455명의, 합계13,300명으로 되어있다({일제하 지배정책자료집} 2, 고려서림, 372).

 그래서 당초의 2,000명 수용계획으로서는 [여전히 부족하므로 다시 1,000명을 증가, 수용하도록 하고 최초의 예정을 변경하여 3,000명의 수용계획을 수립하여](73회 제국의회 설명자료), 1933년을 초년도로 하여 3개년도에 걸치어 정비하여 이를 정부에 기부키로 하고 총 경비 예산으로 115만여원을 계상했다.

 나요양소의 건설장소로는 관립요양소의 소재지인 전라남도 소록도를 최적지로 인정하고 전체 소록도 민유지의 매수, 가옥 기타 각종 기득권 보상 등의 교섭을 비롯한 수차에 걸친 교섭·간담의 결과, 193345일까지 가옥 150여호, 주거자 약 9백여명의 퇴거를 승낙받아 동년 6월말에 도민() 전부의 퇴거·이전이 완료되었다.

 이상의 매수계약가격은 토지(158,841), 가옥(30,544), 임산물(26,417), 수산물(32,465), 이전료(16,621)로서, 확정액의 합계는 264,888원이었다. 그리고 기타 분묘 및 비석, 농산물, 어선()과 어구()에도 이전료 및 보상금이 지불되었다.

 조선 나예방협회가 토지·가옥의 모든 매수, 각종 기득권의 보상, 퇴거교섭 등을 불과 20여일 만에 끝내고 도민들과의 계약을 종료한 것은, 토지는 시가(ʤ)3배를 지불하고, 분묘 1기에 대해 15원에서 40원의 이전료를 지불, 가옥 이전비도 25원이라고 하는 비교적 높은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1916년 이래의 2번에 걸치는 저항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도민()들은 영주()의 희망을 버린 상태였으며, 총독부에 의한 협박과 회유로 자포자기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매수작업은 외관상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행해졌다.

 그러나 매수된 소록도에 동 협회의 모금 등으로 대규모의 확장공사가 시작된 것은 제3대 원장 야자와()1933828일부로 [의원면직()]된 뒤, 경기도 위생과장이었던 스호오()(1885-1942)가 동년 91일부로 제4대원장으로 발령된 1개월 뒤인 동년 10월초부터였다.   

 

 조선 나예방협회의 제1회 평의()위원회는 1933415일에 개최되어 부회장과 이사장을 겸하고 있던 이케다()가 사업보고를 했다. 그는 보고에서 조선 한센병환자의 [수용구료(ϴ)의 설비] [요양소의 경비(ި)]에 관한 계획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용소의 신축설비에 요하는 비용과 수용 뒤의 경상비에 관한 것입니다. 내지(Ү)의 경우, 관립 나요양소인 오카야마현(˪ߣ)의 나가시마() 요양소는 환자 400명수용에 대해 건축 및 설비비가 약 100만원 들었으며, 군마현(ة)의 쿠사츠()요양소도 1,000명수용에 대해 백여만원의 예산으로 지금 건설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기부모금 성적이 양호하다고는 하지만 70만원 미만의 금액으로 3,000명 이상의 수용설비를 하려는 것 인만큼, 건축방법에 있어서도 가능한 한 경증()의 환자들을 사역()상당한 경비를 절약, 경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경상경비에 있어서도 내지 요양소의 경비는 1인당 300원 내외를 필요로조선에서는 불과 123원으로 경리()하려는 계획입니다({조선공론} 19335월호, p.38-39).

 

 이처럼 조선나예방협회 즉 조선총독부의 간부들은 소록도 [()]요양소의 확장계획에 있어서, 당초부터 일본국내의 []요양소보다 훨씬 싸구려 수용시설과 설비, 그리고 수용환자의 사역에 의한 요양소 경비의 절감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록도 나()요양소의 제1기 확장공사(193310월∼359)를 소록도에서 직접 진두지휘한 것은 제4대원장인 스호오()이다. 그가 어떤 경력을 가진 자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스호오 마사스에()) 스호오 마사스에()(1885-1942) 경기도 위생과장으로부터 1933년 제4대 소록도갱생원 원장이 된다.

   입소환자에 의해 1942622일 살해당한다.

1885108일 일본 시가현(߾(현재의 쿠사츠시() 야바시())에서 태어났다. 생가(ʫ)의 성은 [오오가()]로 대대로 무치자키()신사()의 궁사()를 역임하고 있었다. 넷째아들이었던 마사스에()190217세 때 같은 마을의 의사인 스호오 토시히코()의 양자가 된다. 그 뒤, 시가()현립 제일중학교를 마치고 19051월 아이치현() 의학전문학교(나고야(٣ͯ)대학 의학부 전신)에 입학하여 19093월에 졸업했다. 의사자격을 얻은 후에 아이치()현립 오카자키(˪)병원 외과부의 진찰의로 취직, 1년 정도 있다가 내무성 방역관보(ί)가 되어 히로시마()에서 근무했다.

 1914년 양부(ݫ)의 사망한 후 고향인 기후현(ݽ) 야바시()로 돌아가 가업을 계승했으나, 1916년 다시 관계(ίͣ)에 복귀하여 시가현() 경찰부기사() 학교위생주사로 근무하다 1919년에 아이치현() 기사학교 위생주사에게 전임했다. 그 즈음, 야학교에 다니면서 건축설계와 제도의 기술을 습득하며, 이 경험은 뒷날 유감 없이 발휘되게 된다.

 1921330일 스호오()는 아이치현() 기사()에서 조선총독부 기사로 임명되어 경기도 경찰부 위생과장에게 취임한다. 19269월에는 [조선도립의원의관(ί)을 겸임]하면서 다음해인 19277월까지 구미(ϱڸ) 각국의 의료위생사정의 시찰을 위해 출장을 명(٤)받는다. 귀국 후에는 경기도 경찰부 위생과장으로 경기도의 마약(아편, 몰핀, 헤로인 등)중독환자의 대응에 임한다. 그런 한편 경성()제국대학 약리학교실에 적()을 두면서 [몰핀]중독에 관한 연구에 몰두한다. 그리고 그 연구성과를 정리하여 경도(Դ)제국대학 의학부에 학위를 신청하여, 19321027일 의학박사의 칭호를 얻는다.

 이러한 스호오()의 모습이 총독부 경무국 위생과장 니시키(߲Ф)를 위시한 조선총독부 수뇌들의 눈에 띄었다고 생각된다. 193212월의 조선나예방협회 설립에서는 발기인에 그 이름이 보이며, 경기도 경찰부 위생과장으로서 도내(ԳҮ)로부터 다액의 기부금을 모았다고 전해진다. 거무스레한 얼굴에 6(1.8m) 장신의 튼튼한 체구를 가진, 야심적이고 추진력이 강한 인물로서 명예욕도 컸다.

 소록도자혜의원의 제3대 원장 야자와() [의원면직]으로 떠난 뒤, 스호오()가 제4대 원장으로 소록도에 부임되게 된다. [그가 임명된 것은 그가 스스로 바란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나병요양소의 확장을 계획하고 있었던 조선총독부가 의사이며 건축기사였던 그의 경력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진다](최창기 [스호오 마사스에나환자에게 살해된 소록도원장], 정근식() {근현대의 형성과 지역 엘리트} 새길, 1995pp.209-14).

 당시의 {오오사카·아사히신문·조선판}에도 [위생경찰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스호오() 신임원장]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으며, [나환자의 수용할당 정해지다/자혜의원장도 결정]이라는 표제하에 [과반(Φ) 퇴직한 소록도자혜의원장 야자와()씨의 후임은 1일부로 경기도 위생과장 스호오()씨로 결정되었으며, 이 중대한 특수사업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동씨의 열력()수완으로 볼 때 적임으로 평가된다]라는 기사와 함께 [소록도 국립자혜의원장으로 결정된 경기도 위생과장 스호오()씨는 1921년 아이치현() 기사로부터 경기도 위생과장으로 전임된 이래, 13년간 동() 과장으로서 방역위생에 주력해 온 위생경찰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인물이다](193393일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소록도에서의 대규모적인 제1기 확장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소록도의 부지 총면적 1487,595(491)중 동측 1/3 [건강지대], 서측 2/3 [병동지대]로 나누어 건축은 193310월부터 시작되었다. 확장공사에 있어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벽돌생산이라고 생각한 스호오()원장은, 판매수익까지를 고려하여 연간 140만장의 생산능력을 갖은 벽돌공장을 미리 세웠다. 벽돌의 자급은 섬 안에 양질의 원토()가 무진장으로 있어 환자들에게 만들게 한다면 공사비를 절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벽돌공장에 이어 다음해인 19343월말에는 선착장 공사 및 선착장과 공사현장을 직접 연결하는 도로공사가 거의 끝나, 확장공사에 필요한 재료 등 제반물자의 운반이 용이하게 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확장공사에는 수용환자들의 다량의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조선나예방협회 사업개요}(193510)에는 [환자의 활동]이라 하여 다음과 같은 기술이 엿보인다.

  

 관사지대의 토목공사는 보통 인부를 사용하였으나 병동지대는 주로 환자의 노동력에 맡길 방침을 취했기 때문에 경증()병동, 각종 부속건물, 공회당, 형무지소, 운동장 등의 부지공사의 전부 및 도로와 매립공사의 대부분은 환자들의 손에 의해 행해졌을 뿐 아니라 병동지대의 벽돌, 목재, 율석(), 자갈, 모래 등 건축재료의 양육() 또는 운반, 기초 콘크리트 공사, 각 병실의 온돌놓기 등도 역시 대부분 환자들의 취역()에 의해 행해졌으며, 또 벽돌제조에도 출역()하여, 그 출역 총연인원은 98,000여명에 이르러, 공사의 진척과 공사비의 경감에 다대한 공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 취역자()에 대해서는 근소한 작업수당을 지급했다(p.20).

 

 1934914일 칙령 제260 [조선총독부 나요양소 관제(ί)]가 공포됨으로서 도립 소록도자혜의원은 [조선총독의 관리에 속]하는 국립 나요양소가 되었다. 또한 그에 따라 총독부는 [부령]에 의해 명칭을 소록도갱생원으로 명명하는 동시에 동년 101일부로 직원들이 발령되었다. 간부직원들을 살펴보면 스호오()는 계속해서 소장(원장)으로 남고, 서무과장에 요시자키(ӹڸ), 의무과장에 타다(), 약제과장에 닛타()가 임명되었다.

  [(ݤ)훈령 제41]에 의한 [조선총독부 나요양소 사무분장규정]으로, 서무과는 [환자의 입소 및 퇴소에 관한 사항], [환자의 작업, 위안 및 교양에 관한 사항], [소내(Ү) 단속에 관한 사항] 등의 사무를 장악하게 되었다. () 과장으로 임명된 요시자키()는 조선총독부 전라남도 경찰부 고등과장(경시)으로부터 전임()된 인물로 19419월까지의 7년간에 걸쳐 소록도갱생원의 서무과장으로 근무했다.

 

 2년에 걸친 제1차 확장공사의 결과, 대소 5백여 시설의 대공사가 마무리되어 3,770명의 수용능력을 가진 시설이 완성됨으로서, 19351021일에는 성대한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19361월호 {애생}지에는 [소록도 견문]이라는 제목이 붙은 내무성 위생국 예방과장 타카노(׿)의 수기를 싣고 있다. 그 일부를 다음에 소개한다.

 

 선착장에 자동차가 줄지어 있다. 버스도 몇 대인가 머리를 맞추고 있다. 내지(Ү)의 나요양소에서는 나가시마()에서도 오오시마()에서도 자동차를 찾아볼 수 없다. 과연 이곳은 대규모라는 점에 또 다시 감탄한다.

 자동차는 잠시 달려 소록도 신사()의 토리이() 앞에 정지한다. 신사는 언덕 위에 있어서 조망개활(), 마치 경성()에 있는 조선신궁()을 연상케 한다. 갱생원 공사에서 남은 콘크리트로 건축했기 때문에 매우 싸게 지었다고 니시키()과장은 신위()를 모독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랑한다. 신사 앞에서는 바다도 보이고 대안()도 보여. 마지막으로 놀란 것은 이 섬에는 나환자의 형무소까지 있다는 점이다. 이는 섬에 있는 불량환자를 가둔다는 의미의 금고실()이 아니라 그야말로 본도()의 형무소인 것이다. 조선 전국토의 형무소에서 복역 중인 나환자는 추후에 이 곳으로 모아 나환자에 대한 형무()를 충분히 행한다는 것이다. 이곳의 감시원들은 원래 갱생원 직원 가운데서 원하는 자를 모집하여 형()을 습득토록 한 것이므로, 그 직무수행에는 차질이 없을 것이다. 나환자 형무소는 아직 내지(Ү)에도 없는 시설이다(p.17-19). 

 

 소록도 신사()는 소록도자혜의원 개설에 따라 19178, 하세카와() 조선총독의 권고에 의해 조영되었으며 천조대신()을 제신()으로 모신다. 소록도 나()요양소 제1차 확장공사에 즈음하여 재래의 몹시 작고 낡아빠진 사전()을 철근 콘크리트로 건립키로 하고, 19354월에 기공하여 신사 및 배전(), 토리이(), 화장실, 돌층계, 석등 등을 겸비한 소록도 신사를 조영하고 [병동지대]에는 그 분사()를 건립했다. 그리고 일본인 직원은 물론 수용된 조선인 환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제(˭)한 것이다.

 조선 나예방협회는 소록도에 형무소 및 형무소 직원관사 등의 건물을 신축하여 이를 정부에 기부했다. 신축비로서 37,500원을 계상하고 19354월에 착공하여 벽돌조 기와지붕의 400(1,320)의 신축건물을 동년 9월에 완성했다. 이미 동년 7월에는 광주형무소 소록도출장소가 설치되어 동 출장소장에는 소록도갱생원 서기인 요코카와()가 임명되었다.

 일본국내의 [나요양소장]의 회의에서 종종 요청되면서도 실현되지 못했던 형무소를, 소록도갱생원에서는 1935년의 확장공사에서 이미 설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1936810일 나가시마 애생원에서 발생한 [나가시마()사건]이 겨우 진정되기 시작한 828일부터 1개월 남짓 지난 101일과 2일의 양일 간에 걸쳐 [관공립나요양소 소장회의]가 내무성 회의실에서 예정을 앞당겨 개최되었다. 각 요양소의 원장 이외에 사무관과 서기, 해당 현()의 위생과장, 내무성, 사법성, 탁무성()의 직원 등 33명이 출석했다. 나가시마 애생원에서는 미츠다()원장, 요츠야()사무관, 미야카와()서기, 3명이 출석하고 있었다.

 이 회의에는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던 대만(ؽ)의 낙생원장() 카미카와(߾), 조선의 소록도갱생원장 스호오()와 서기인 후타에다(), 남양청() 사이판 의원장 후지이(), 4명이 참가하고 있다. 소장회의에서 협의된 의제는 사건의 재발방지와 [불량]환자를 수용하는 감금소 및 나()형무소의 설치요구 등이었다.

 회의의 상세한 회의록은 나가시마 애생원의 미야카와() 서기에 의해서 기록되어 현재 [애생도서실]에 보관되어 있다. 이 회의록에는 [나가시마 사건]에 관한, () 당국이 손에 의해 작성된 B4판의 21장의 자료가 첨부되어 있다.

 소장회의가 개최되기 하루 전날인 930, 토오쿄오() 칸다()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오후 1시부터 [사전모임]이 있었다. 출석자는 나가시마() 애생원(), 쿠류우() 낙천원(), 호시즈카() 경애원(), 미야코(ͯ)요양소, 전생()병원, 북부(ݻ)보양원, 소토시마()보양원·오오시마()요양소·큐우슈유()요양소의 각 원장과 약간의 직원, 그리고 식민지의 [()]요양소로서는 소록도갱생원장 스호오() 단 한 사람만이 출석했다. 사전모임의 출석자수는 16명이었다.

 모두(ٳ)에 나가시마 애생원의 미츠다()원장은 인사말에서 [사건의 원인의 개략을 설명하고, 이것은 각 요양소의 연대책임이다. 금후 이로 인하여 1만명계획에 차질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나가시마 애생원의 요츠야() 사무관으로부터 사건의 원인과 설명이 있었다.

 협의 가운데서 미츠다 원장은 [일반적으로 이해를 하지 못해, 이번 사건에서도 오카야마(˪ߣ) 검사는 {먹이가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식으로 멋대로 처리해 버렸다]고 발언하고 있다. 당시 검찰관들의 한센병환자에 대한 극명한 차별의식을 엿볼 수 있다

 소록도갱생원의 스호오()원장은 101일의 소장회의에서 [소록도형무소의 실황설명]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에서의 형무소는 1933년경에 계획되었으나 형무국()과 법무국의 감정문제로 실패했으며, 두 번째도 잘 풀리지가 않았다. 세 번째는 무릎을 대고 담판한 결과 10만원의 예산을 계상했으나 삭감되었고, 야마자키(ߣ)검사가 설득하여 설비비는 조선나예방협회가 내고 경상비는 형무국()에서 내기로 이야기되었다. 38천원이라는 돈을 받았으나 실제로는 18천원, 100명을 예상으로 건립했다. 현재 58. 가장 많이 입소했을 때가 65명이었다. 입소자는 두 부류로 나눌 수가 있다.

 최근 북쪽 병사의 주동자 11명이 순시()를 구타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발생 당일인 2일날 본인은 경성()에 있었으나, 사건을 듣는 즉시 검사와 상의하여 8일부로 고발, 하루만에 공판을 끝내고 수감했다. 형무소의 설립은 사법성()의 윗분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어렵다. 처음에는 미결(ڱ̽) 구류장(Ϭ׺)을 만들 계획이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현재, 간수() 13명과 간수장 1명으로 관리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사법성 관하이나 실제로는 원장()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어있다. 최근 두 명을 타살(߯)했다. 형무소는 취급하기 곤란하다](1936101, 2일 관공립 나요양소 소장회의 회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