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Ө)]과 우생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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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센병환자에 대한 [단종(Ө)]의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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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1127, 갓 개원한 호시즈카() 경애원의 원장 하야시()는 동원()의 의무과장인 시오누마()에게 한센병환자 수용을 지휘하기 위해 급거 오키나와()로 출발하도록 명령했다.

 다음날인 28, 두 사람의 직원과 함께 시오누마는 카고시마()항에서 오키나와()항로의 수리환()에 승선했다. 오키나와에 도착한 시오누마 일행은 현지에서 환자들의 집들을 방문하기 시작한다. {성좌() 1집·건설편} 호시즈카 경애원 위안회발행(1936)에 삽입된 사진에는 칼을 찬 경찰관을 동행하여 환자의 집을 찾은 시오누마의 모습과 함께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붙어 있다.

 

 환가(ʫ) 방문 : 산간계곡, 이도()에 숨어사는 나환자를 방문하여 황실의 인자함을 전하고 요양소에의 입소를 권유한다. 한사람의 환자집을 방문하기 위해 하루가 소요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에 의해서 세상의 저주받은 자들이 황실의 은화()에 의해 빛을 발견하고, 요양소를 몰랐던 자들이 안주의 낙원이 있음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모습은 우리들로서는 무엇보다도 커다란 위안이 된다(p.273).

 

  시오누마 일행들이 행한 제1회 오키나와 수용에서 입원한 환자는 129명에 달했다. 그 중에는 어린이를 동반한 부부도 몇 쌍 있었다. 호시즈카 경애원 당국은 입원당초부터 적극적으로 단종수술을 권유했으나 남자들은 이 굴욕적인 단종수술을 혐오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뒤 원() 당국이 취한 행위에 대해 호시즈카 경애원 입원자 자치회편 {이름도 없는 별들이여}(1985)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때 가까운 쿠시라정()으로부터 입원했던 남자가, 때때로 무단으로 귀성()하여 처자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는 이유로 수술실로 끌려가 단종수술을 당하기 직전에 놀라서 도망친 사건이 있었다. 고향에 처자가 있는 사람까지 단종수술을 시키려는 시설 측의 태도에, 독신남자들까지 반발하여 원내(Ү) 전부를 휩싼 소동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 소동에 리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 중 큐우슈우() 요양소 시대에 양발을 절단한, 그만큼 요양소의 내정(Ү)에 정통하던 야스무라(, 당시 54)가 어느 틈엔가 중심적 존재가 되어있었다야스무라()는 단종에 관해, 환자의 무지()를 이용하는 시설 측의 방식을 비난하면서 단종수술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승낙에 의해서 실시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 라고, 원 당국의 명확한 회답을 요구했다. (중략)

 야스무라()는 남자 장애자 기숙사인 석무() 3호실에 입거()하고 있었다. 양다리가 의족인 야스무라는 바로 3호실 옆이 식당이었고, 의족을 착용하는 것이 귀찮았으므로 식당에는 항상 무릎걸음으로 왕래하고 있었다. 야스무라는 식사를 끝내고 평소의 모습으로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 때, 사이토() 4명의 백의()의 남자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은 야스무라를 가볍게 둘러메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야스무라는 본관 앞에 대기하고 있던 트럭 짐칸에 실려, 간호사인 요시다(), 사이토(߲)의 감시 하에 미야코노죠오(Դ, 50)까지 끌려가 오이즈() 강변에 방치되었다. 야스무라는 의족도 없이 겨우 도로로 기어올라가 지나가던 사람의 자전거 짐받이에 실려 가까운 파출소로 옮겨졌다. 연락을 받은 미야코노죠오(Դ) 경찰서는 카고시마현() 경찰본부에 조회하여 조사를 시작함과 동시에 야스무라()를 일단 시립격리병사에 수용했다. 193645일 밤의 일이었다](p.38-39).

 

 이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어 비난을 받기 시작하자 하야시()원장은 야스무라()는 무균자이며 원()의 시책을 비판하고 입원자들을 선동하여 원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위험분자라고 강변했다. 그리고 경찰의 야스무라의 인수요구도 그런 이유로 거부했다. 하야시()원장과 시오누마 의무과장 등은 [당시 본인의 승낙 없는 실시는 위법임에 분명한 단종수술]을 강행하고 있었다. 게다가 [단종]에 반대하는 양발이 없는 중증환자인 야스무라를 호시즈카() 경애원으로부터 추방하는 비정함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결국 야스무라는 시()의 부인회가 모금한 돈으로 고향인 오키나와()로 돌아갔다.

 하야시 원장이나 시오누마 의무과장의 배후에는 황태후가 있어 [황실의 인자함]으로 [구라(ϭ)의 기치를 내걸고] 선의로 행하는 행위는 어떤 것이라도 용서된다는 자부심과 오만함이 있었다고 생각된다([야스무라 사건]에 대해서는 오카노 유키오가 쓴 {하야시 후미오()의 생애} 신교출판회(1974)pp.211-216에도 기록되어 있다).

 19383, 시오누마() 의무과장은 쿠니가미() 애낙원의 초대원장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15년 뒤인 195311월에 발행된 {애락지()} 2호에 [개원15주년을 맞이하여]라고 제목의 단문(ӭ) 가운데서 [본인은 현민() 여러분에 대해서는 위생사상의 보급입원 부부환자에게는 우생수술(단종수술)이 적법()함을 권장하여]라고 말하고 있다. [입원 부부환자에게는 우생수술(단종수술)의 적법]이라는 것은, 1948911일부터 시행된 [우생보호법] 2장 우생수술 항의 제3(의사의 인정에 의한 우생수술) [3.본인 또는 배우자가 나질환에 걸려 자손에게 이것이 전염될 우려가 있는 자]를 가리킨다.

  [우생보호법]이 개정되어 [모체(ٽ) 보호법]으로 바뀐 것은 1996614일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전제로 근대일본의 한센병환자에 대한 [단종]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다.

 

[일반진료 업무개요 : 외과에서는우생수술로서는 오로지 수정관 절제술만을 행했으며 여성에게는 시술하지 않았다}.

 국립요양소 나가시마 애생원 {1958년 연보}(195981일 발행)36쪽에 있는 상기(߾) 기록을 동원() [은사() 기념관] 뒷방에서 처음 읽었을 때, 필자는 깜짝 놀랐다.

 이 연보에는 그 뿐만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통계내용도 기재되어 있었다(130). 1958년이라면 그 전년도인 1957831일에 [원장 미츠다()의 사직승인 및 스루가() 요양소장 타카시마()의 원장으로의 재배치]가 행해져, 타카시마() 2대원장의 시기에 들어간다.

(-20)에 의하면 현재인원은 [부부사 653, 대용()부부사 84, 장애부부사 103명으로 합계 840, 즉 약 420쌍이 [부부사]에 수용되어 있었다. 당시의 입원환자가 1.738명이었으니까 (-21)를 보는 제시된 바와 48·3%, 즉 입원자의 반수 정도가 [부부사]에 수용되어 있었다.

구 분

동수()

다다미 장수

실수()

정수()

현재인원

입원자 총수

 

부 부 사

102

1,647

333

666

653

   1,738

 

대용부부사

 15

 255

 21

 84

 84

 

장애부부사

  9

 316

 42

132

103

 

합 계

126

2,218

396

 882

840

 

구분

입원자총수에 대한 현재인원

현재인원 1인당 다다미 장수

1실당 현재인원수

부 부 사

37.6%

2.52

1.96

대용부부사

 4.8%

3.04

4.00

장애부부사

 5.9%

3.07

2.45

합 계

48.3%

2.64

2.12

 420쌍이라고 일부러 []자를 붙인 것은 부부사의 수용자수가 홀수로 되고 있어 [배우자]가 사망한 뒤에 아직 [보통사()]로 이전하지 않은 사람이 보이기 때문이다. [대용부부사()]라는 것은 1실에 1쌍의 남녀가 동거할 수 없어 [큰방]2쌍 이상의 부부가 수용되어 있는 경우를 말한다. [장애부부사]는 장해가 심한 환자가 수용된 병동으로 이 경우도 1실에 2쌍 이상이 수용되어 있었다.

 1인당 면적은 부부사의 경우 다다미 2.52, 즉 부부 1쌍에 평균 다다미 5장 정도의 넓이다.

 그러나 필자와 친한 우사미(ڸ)씨가 나가시마 애생원에 입원한 패전 직후의 시기에는

 [내가 들어간 성인사()는 다다미 12장 반에 4명이 들어가 있었고, 부부숙사에는 부부4쌍이 들어가 있었어요. 다다미 12장 반에 4쌍이에요. 더구나 커텐이고 뭐고 아무런 칸막이도 없다니 말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이건 환자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지요](p.97)라고 말하고 있다(타게다 토오루() {[격리]라는 병} 강담사선서, 1997).

   

1951

1953

1954

1956

1957

1958

부 부 사

 662

  611

  641

 648

650

 653

대용 부부사

 -

  46

  24

  50

72

  84

장애 부부사

 -

  84

 106

 124

84

 103

 

 662

  741

  771

 822

806

 840

애생원 입원자 총수

1,580

1,640

1,646

1,727

1,708

1,738

 (-22)1951연말부터 1958연말까지의 []등의 수용현재인원수를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초대원장 미츠다() 당시의 각 {연보}에는 [일반진료업무개요]의 항에 [우생수술로서는 결혼자에게 단종수술을 실시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2대원장 타카시마()로 바뀐 1957년 이후에는, 동일 개소가 [그리고 우생수술로서는 오로지 수정관 절제만을 행하여 여성에 대해서는 시술하고 있지 않다]라고 기술이 바뀌어 있다.

 단종수술의 실시에 관해서 나가시마 애생원 입원자 자치회편 {격절(̰)의 이정표나가시마 애생원 입원자 50년사}(1972)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종신격리 방침을 채용한 일본의 나정책에 있어 소내(Ү)의 성()의 처리는 특히 큰 과제였다(중략). 정책측이 채용한 대응은 단종수술(우생수술)을 받게 한 뒤, 소내(Ү) 결혼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리델 등의 외국인의 경영자들은 이에 반대였지만, 미츠다() 원장 등은 이를 일반화했다. 그러나 소내(Ү)결혼을 인정한 것이 격리를 강행하는데 끼친 역할은 크다. 그 때문에 나요양소 속에 병원으로서는 변칙적인 부부사()라는 것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단종수술은 법적 근거가 없이 계속되었다(1958년 이후 [우생보호법]의 대상이 되지만 강제(˭)는 아니었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부부주택에 들어 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강제나 마찬가지였다.

 단종수술도 전후() 80세의 노파와 결혼하는 상대의 남성에게까지 시술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5210월부터는 결혼할 경우에도 강제하지 않게 되었다(p.136-7).

 

 그런데 나가시마 애생원에서는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단종수술을 받았을까? ()측이 부부주택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단종수술을 강제하지 않게 된 195210월 이전에 [부부사()]에 입주한 1951년말 현재의 622(311)의 부부중의 남성환자는 모두 단종수술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남성 311명은 1951년 전까지 단종수술을 받았던 셈이 된다. 1951년의 [부부사]의 수용인원은 622명이었지만 해마다 늘어서 1958년도 말에는 840명으로 불어난다. 218명의 증가이다. 195210월 이후는 [부부사]입주자에 대한 단종수술의 강제가 없어져, 원측이 권하더라도 단종수술을 거절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부부사]에 입주했던 환자가 사망하여 새롭게 입주한 사람으로서 원측의 권유로(1960년경에도 원측은 부부사 입주자들에게 단종수술을 권했다고 한다) 단종수술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1958년의 {연보}를 보면 [우생수술(수정관 절제술) 6, 인공임신중절 3]이라고 기록이 있다) 아오키(ڸ) [한센병환자들의 강제된 상황국립요양소 입소자의 실태조사에서]({카에데() 20003.4월호, 219)에는 [당초, 우생수술은 원내결혼의 조건으로서 행해져, 나가시마 애생원에서 원내결혼한 남성 중 6할에 달했습니다. 최근에는 소화()40년대(1965-74)에도 결혼조건으로서의 우생수술이 행해지고 있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p.121).

 일본의 한센병요양소에서의 단종수술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전생()병원에서 한센병환자에게 단종수술을 처음으로 시술한 것은 동() 병원장이었던 미츠다()였다.

 타마(ؤ) 전생원 환자자치회편 {구회일처()환자가 쓴 전생원의 70)}(, 1979)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연표]7쪽에 실려있다.

 

 19154월 단종수술을 전제로 소내(Ү)결혼을 인정하다. 요양소가 평생의 생활장소화 되어 가는 경향이 강해짐에 따라 환자 양성()간의 교제가 행해져, 시설 측은 해마다 증가하는 출산아의 조치에 골치를 앓고 있었으나 그 해결책으로서 미츠다()는 일찍이 단종수술(정계결서수술(ͧ̿))을 채용하기로 했다. 최초의 희망자 30. 내무성은 법적인 애로() [환자로부터 승인서를 받고 행하도록] 지시했고, 이후 혼인신고는 단종수술 신청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케다() (ٻ)(38)에 대해 최초의 단종수술을 실시(24).

 

 미츠다()는 스스로 행한 단종수술에 관해 수많은 보고를 하고 있다. 25회 일본 피부과학회에서 [단순한 수정관 절제술]을 보고한 뒤, 같은 제목으로 {피부과 및 비뇨기과 잡지}25권 제6(1924)에도 발표하고 있다.) {나가시마 기요(Ѻ)} 13(19653) [미츠다() 명예원장 추도]특집에서 사쿠라이(۰)(나가시마 애생원 의관) [미츠다()선생을 그리며]라는 좌담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고 있다

 [나는 소년시대로부처 선생님의 신세만 지는 불초()의 자식이었다. (중략) 선생님은 2번 법률을 위반한 적이 있다. 그 하나는 양육원에서 몰래 환자를 해부를 한 것. 두 번째는 전생병원에서 단종수술을 한 것으로, 경찰에 끌려갈 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81). 

 

 그 후, 미츠다()가 보고, 기술한 수많은 내용들 가운데서 그 일부를 소개한다.

 

 나환자에게 [단종수술]을 실시해 본 연자()20년의 경험으로 보아 본법()은 피수술자에게 하등의 성욕감퇴를 초래하는 일 없이 모체의 임신, 분만에 의한 병세의 악화를 예방하며, 아울러 그 조작이 매우 간단하여 나병의 근절법 중 백미(ڶ)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연자()는 수정관 하부의 절제, 즉 국소마취 뒤에 음낭후면의 피부를 불과 1만 절개하여 수정관을 노출시킨 뒤, 그 일부를 절제할 것을 추천한다]([단종수술]에 대하여, {피부과 비뇨기과 잡지} 41권 제3, 1937, 일본피부학회 제32회 오카야마(˪ߣ) 지방회에서 발표. 미츠다() {()에 관한 논문} 3, 1950, p.12 수록).

 

 우리 요양소에서는 남성환자에게 단종수술이 은연히 행해져 1,000명 넘었다고 생각된다. (중략) 본 연구의 동기가 되어 [단종수술] 24년을 생존하여 사회적 활동을 계속한 쿠리시타()에게 한 쪽의 고환을 제공하도록 권고했다. 그는 전생()병원에서 20년간 요양한 뒤, 이어 애생원에 와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신경나() 환자이다. 그는 51세로 경과는 40. 1915년 봄, 28세 때 전생병원에서 솔선해 [단종수술]을 받았다({레프라(lepra)}10권 제1, 1939년 미츠다() {()에 관한 논문} 3, 1950p.31-32 수록). 

 

 ()부부는 아이를 낳지 않은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이는 인도상으로도 예방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중대한 일이다. 나는 의사로서 진지하게 이 문제를 검토한 결과, 우생수술(단종수술)을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로 우생학에 의거하여 인류의 유전적인 소질을 없애기 위해 외국에서는 일찍부터 주장되어 왔었다.

그 방법은 남자의 수정관의 일부를 절개하고 위아래의 끝을 묶어서 흐름을 막는 것이다. 이것은 국부마취로 20분 정도에 끝나는 간단한 수술이었다.

 그러나 실시하게 되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혹시나 해서 하나이() 변호사와 동경대학의 마키노()박사에게 물어보았다. 그 회답에 의하면 [다른 제삼자가 고소(ͱ)하면 상해죄를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선의와 성실로서 하는 일이다. 용기를 내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만일 내가 고소를 당한다면 형무소에 가면 그만이다, 라고 각오를 했다(미츠다() {애생원 일기} 마이니찌()신문사, 1958, p.69-70).

 

 남성 한센병환자에게 미츠다()는 어떠한 이유로 단종수술을 실시한 것일까? 미츠다의 기술()을 시대순으로 나열해 보면 그 겉마음과 본마음이 들어난다. 19206, 미츠다는 [나환자 남녀공동수용에 동의하는 의견]을 쓰는데(등풍협회편집·발행 {미츠다()와 일본의 나예방사업} 1958, pp.55-58), 이는 전생병원에서 최초의 단종수술을 시작한 1915년 봄부터 5년이 지난 다음의 일이다. 이 의견서는 쿠마모트() [회춘()병원]원장 한나 리델이 [정부가 가까운 장래에 국립요양소를 설립함에 있어, 남녀를 별도로 수용토록 할 것을 희망한다고 말하나, 이에 대해 본인은 전혀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기 때문에] 쓴 것이다, 라고 미츠다는 동() 의견서에서 말하고 있다(전게(̩) {미츠다()와 일본의 나예방사업} p.55).) 기독교사회주의자로 사회대중당당수인 아베(ݻѴ)(18651948)도 우생학상 한센병환자의 [정계결서(ͧ̿)]를 추장했다. 아베(ݻ) {차세대의 낭청(), 오카쿠라(˪)서방(1937)}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산아제한은 결코 남용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백치, 나광(), 나병, 기타의 우려가 있을 경우에는 단순한 제한법()이 아니라 본인 혹은 근친자의 승낙을 얻어 정계결서(ͧ̿)를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생학적으로 보더라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89)

 

 이 의견서는 3절로 되어있다. [1 관리상 경제상 남녀공동수용는 타당한 것],[2 양성() 각별 격리는 오히려 자포자기적 행위를 조장하는 것],[3 차세대의 위험방지는 용이하다는 것]3가지를 들고 있다. 그 중에서 제2와 제3의 내용을 다음에 소개한다.

 

2 양성() 각별 격리는 오히려 자포자기적 행위를 조장하는 것

 성욕의 금단은 이따금 정서의 변태를 초래하며, 니원()이나 여자감옥에서는 침울()비관적인 기분이 있고, 남자만의 장소에는 난폭낭적(կ)의 기분이 있다. 특히 나()와 같은 자포자기 환자에 있어서는 그 정조()가 격월(̭)되면 나병원을 탈출하여 건강한 여자를 범하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없으며, 1909년 모(ٻ) 요양소에서는 개원 직후 남자환자가 간호원에게 폭행을 가하려 한 적이 있으며, 또 근년에는 모(ٻ) 사립요양소에서 나환자가 교양 있는 비구니를 도발하여 둘이 함께 분화구의 연기로 사라진 비극도 있었다. 성욕을 억제한다는 것은, 소수의 환자에게는 가능할지 모르나 다수의 환자를 수용하여 평생 이를 요양해야만 하는 요양소에 있어서는 곤란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남녀관계에 있어서 난폭낭적(կ)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어떠한 자폭자기 환자라 하더라도 여성의 환심을 얻기 위해서는 그 폭위()를 들어내지 않고 호랑이가 바뀌어 고양이와 같은 자가 된다. 그리고 아무리 뻔뻔스럽고 다음()한 부인이라도 그 적당한 배우()를 얻게 되면 처녀와도 같은 치태()로 변한다.

 3 차세대의 위험방지는 용이()하다

 생각건대 리델 양()의 양성 각별 격리소를 설치해야 한다는 설은, 내연의 부부가 양성소 내에 계속해서 성립되고 그 결과 차세대가 될 자손의 번식을 두려워하여 그 불행한 아동들의 출산을 방지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되나, 본인도 역시 그러한 아동이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만일 요양소 내에서 인생의 좋은 반려인 이성()을 원하는 나환자는 미리 아주 용이하면서도 무해한 중절법을 행하여, 대체로 나병에 있어 고환은 조기(Ѣ)에 침범되어 조만간에 자연적 중절에 도달하는 것으로, 이 자연의 묘기(Ѧ)를 보조해주는 일은 조금도 천의인도(Գ)에 반하지 않는다고 믿는다(p.56-58).

 

 미츠다() [나환자 남녀공동수용에 동의하는 의견]이라는 글이 19206월에 발표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5년 전인 1915년 봄, 미츠다는 전생병원에서 최초의 단종수술을 시술하고 있다. 그리고 전술한 {구회일처()} [연표]에 의하면,

 

 19163월 오오쿠마(??) 내각에 의해 나예방에 관한 법률이 일부 개정되어 [요양소의 장()은 명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피구호자에 대해 필요한 징계 또는 검속을 가할 수 있다]라고 규정되었다(법률제21)(10).

 (동년) 6월 나예방에 관한 시행규칙개정(내무성령제6). 요양소장의 피구호자에 대한 징벌 검속의 권한이 규정되고, 병행하여 감금실이 설치되었다([연표] p.8).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인 움직임을 살펴보면, 미츠다가 말하는 [나환자는 미리 지극히 용이하며 무해한 중절법] 즉 단종수술의 시술이, 요양소에 입소한 한센병환자들의 의료, 복지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요양소장]으로서 요양소 입소자의 관리·통제가 목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일제식민지 지배하의 조선에서도 요양소 입소자에 대한 단종수술은 19364월부터 실시되었지만, 그 목적도 일본국내와 동일했다

 미츠다는 단종수술에 관해, 그 후 [의학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19364 {애생}지에 [단종수술 20주년]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고 있으며, 전후()19585월 발행의 {애생원() 일기}(매일신문사)에서도 단종수술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애생원() 일기} 중의 해당개소를 다음에 소개한다.

 

 따라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자연의 과정이므로, 여기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 아이를 낳아서는 안되지만, 만약에 아이가 태어난 경우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설명해 보기로 하자.

 1. 그들은 전설이나 경험으로부터, 나환자의 아이는 나환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2. 모체가 나()에 감염된 경우, 임신분만은 나균에 대한 저항력을 잃게 하여 병세를 악화시킨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3. 남자의 고환은 피부와 함께 나균이 가장 잘 번식하는 온상이다](p.68-69).

 

 19364월의 {애생}지에 게재된 [단종수술]에 관한 기술() {애생원 일기}와 거의 동일한 같은 논지이다. 전술한 {미츠다와 일본의 나예방사업}으로부터 인용한다.

 

 모체가 나()에 감염된 경우에잠복한 나균이 아동에게 출현하여 발병치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이와 같은 아동의 장래는 다른 건강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정도로 어두운 것이며 부모로서 그 책임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모체가 나()에 감염된 경우, 임신분만은 모체의 나균에 대한 저항력을 박탈함으로서 급격히 병세를 악화시킨다는 것은 주시의 사실이다. 남성은 이러한 의미에서 상해죄를 범한 자로서 책임이 중대하다.

 남자의 고환은 나()를 곧잘 일으키는 장기()로서, 피부와 함께 나균이 가장 많이 번식하는 원천이다. 그 정관(η) 속에는 정충에 섞이어 나균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건 병적인 정액()은 임신을 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라도 생리적인 것과는 달리 허약아를 낳게 할 수 있으며, 또는 후에 태아를 나균에 감염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상의 이유로 나()부부는 임신을 하지 않는 것이 인도적인 견지에서나 나예방의 견지에서도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p.235-236).

 

 미츠다()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후지노()씨는 [미츠다는 모친의 태내에서의 감염이나 부친의 정자로부터의 감염, 또는 임신으로 인한 모체의 병세의 진행, 모친으로부터 유아에로의 감염을 두려워하여 이러한 처치(단종수술)을 했다고 하나(미츠다() [()의 도덕] 26, 19306), 이러한 인식에 의거한다면 한센병 자체는 유전병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와 유사한 형태로서, 모자(ٽ) 또는 부자(ݫ) 감염해 나갈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으므로, 한센병은 우생주의의 대상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일본 파시즘과 의료} , 1993, p.38)라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일본의 한센병요양소에서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단종수술을 받은 것일까? 최초로 이 단종수술을 시작한 것은 미츠다()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15년부터 전생병원에서 단종수술을 실행한지 20년이 된다. 우리들 동지들에 의해서 시행된 것은 1,000명에 미치지 못하는 수이다]({애생} 19364월호). 그리고 15년 뒤, {애생} 19512월호에서 미츠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단종수술]은내지(Ү)의 각 요양소와 순천의 윌슨씨 요양소 및 소록도 갱생원, 쿠사츠()의 나()부락과 아키시(٥) 낙천원() 부락까지도 보급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요양소만으로도 2,000명 이상의 재료가 있다].

 

 미츠다()들의 추천을 받은 단종(수정관 절제수술)은 조선에도 받아들여져 시술되게 되었다. 그 경위를 살펴보자.

 1927413, 조선총독부 병원장 시가(̾)는 토오쿄()에서 돌아갈 때 부산을 경유하여 서울에 갔는데 그 귀로에서 기자들과 [나병의 근절]에 관해 담화하고 있다.

 {동아일보} {오오사카·아사히신문·조선판}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나병 근절은 거세외 무도리(Գ)/거세로 유전방지 시가()박사담

                                                        (1927415일자 {동아일보})

 동경에서 개최된 일본생리학회에 출석하였던 시가()총독부 의원장은 13일 밤에 귀경하였는데 씨는 조선에 비교적 많은 나병에 대하여 [나병자 절멸책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연구도 하고 상당한 의견도 가지고 있으나 제일 첩경은 거세를 하여 유전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 하외다. 그러나 이것은 인도상 문제이니까 쉽게 채용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현재 조선 안에 3만명 가량의 환자가 있을뿐더러 더욱 증가되는 형세이니 거세의 법률이라도 정하여 근멸()을 기다리지 않으면 장래는 무서운 결과를 이끌 것이외다]라고 하더라.

 

 환자의 희망으로 거세를 실행하여 나환()의 박멸을 기한다. 시가()박사의 내지(Ү) 귀래() 담화(1927414일자 {오오사카·아사히신문·조선판})

 총독부 의원장 시가()박사는 12일 아침 부산을 통해서 귀성했는데, 씨의 이야기에 [조선내의 나환()의 현재수는 경찰당국의 조사를 보면 7,000명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 실수()는 적어도 3, 4만명은 될 것이다. ()의 박멸을 꾀하기 위해 내지(Ү)에서는 환자의 희망에 따라 거세를 실행하고 있으나 그 철저를 기하기 위해서는 조선내에서도 이를 실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치료법도 연구되어 있으나 아직 적확()한 방법이 발견되지 못해 전치자()3, 4%밖에 없는 실정으로 환자의 혈족관계자를 따로 떼어 별거시킨다는 것은 실제문제로서 행해지기 어렵다고 생각된다(부산).

 

 시가(̾)의 이 담화가 {동아일보} 등에 보도된 6년 뒤, 미츠다()는 나가시마 애생원 서기인 미야카와(, 190549)를 동반하여 소록도자혜의원 등 조선의 나요양소를 시찰하는 여행에 나섰다. 1933716일부터 11일간의 시찰 중 대구에 들러 {대구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담화를 행하고 있다.

 

 나환자는 격리하면 줄어든다/수정관 단절은 자타()모두 행복/

                                        내구()중의 미츠다()씨 담화(1933725일부)

 나환자의 구세주라고까지 불리고 있는 권위자인 오카야마현(˪ߣ) 오쿠군() 국립나요양소 나가시마 애생원 원장 미츠다()씨는 이번에 내선()하여 전남 순천, 소록도의 양 지방의 나환자 상황을 시찰하고 경성()을 경유하여 24일에는 대구부외(ݤ) 내당동 대구나병원을 시찰한 후 경주를 향해 출발했는데 씨는 말한다.

 조선에 여러분의 진력()으로 말미암아 나예방협회가 건설된 것은 병자는 물론 일반사회를 위해서도 경하()할 일이다. 이 나병은 격리요양하면 점차로 감소하는 것으로 장래 조선의 나병도 해마다 감소해 갈 것으로 믿는다. 내지(Ү)에는 명치39년 상정() 24,000명이나 있었으나 격리한 이래로 그 수가 감소되어 현재는 14,363(경찰조사) 밖에 없다. 국립 7개소, 사립 6개소의 요양소에 약 5,000명이 수용되어 있으며 종래에는 유랑환자만을 수용했으나 수년 전부터 보통환자라도 전염되기 쉬운 위험한 환자에 대해서는 현지사()가 강제적으로 입원, 격리시킬 수 있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요양소에 들어가면 몰라볼 만큼 치유되어 입소하고 있지 않는 환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7, 14년이 지나서 재발하는 경우가 있으니 곤란하다.

 한편 본능적인 이성접근 문제에 관해서도 각인각설이 있으나 내가 있는 곳에서는 희망자에 한하여 남자의 수정관을 잘라 자유로운 부부생활을 허용하고 있으나 이는 단지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일 뿐 보통의 부부관계와 한치도 다름이 없다. 그래서 근래에는 부부가 되려는 환자들이 자신하여 신청해 수술을 받게 되었다. 1915년 이래, 본인이 수술해 준 것이 300명 이상이다.

 이 병은 유전하는 것이 아니라 전신에 퍼져있는 모친의 병균이 연약한 태아를 습격하여 전염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아이를 놓지 않는 것이 최선책이다. 오늘 부외(ݤ) 내당동의 환자부락을 시찰했을 때 수많은 어린이들이 눈에 띄어 몹시 가슴이 아팠다. 현재 내지에서는 토오쿄오 요양소 기타 지역에서도 수정관 절단을 실시 중에 있으며 성적이 양호하다. 조선의 환자들도 자발적으로 수술하면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미츠다()가 조선시찰여행을 한 1933, 그 해 91일 스호오()가 소록도자혜의원의 제4대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소록도자혜의원 제1기 확장공사의 시작이다. 1차 확장공사의 낙성식은 19351021일에 거행되었다. 다음해인 364월에는 소록도갱생원에서도 단종수술이 부부동거를 조건으로 시술되게 된다. 수용환자의 급증에 따른 원()측의, 환자에 대한 [관리·통제]의 강화이다. 또 일본국내의 요양소와는 달리 식민지조선의 소록도갱생원에서는 수용환자의 처벌로서의 [단종]이 부가적으로 실행되었다. 임신한 여성에게 낙태가 강요되고 태아들은 죽임을 당했다. 소록도갱생원 {소화12년 년보(19387)} [부부환자의 동거]라는 항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엿보인다.

 

1. 당원 환자는 1917년 개원이래 남녀 별거제를 유지해 왔으나 1934년 이후의 대확장에 따른 환자의 증가수용으로 인하여 부부환자의 수도 현저히 증가되었으며, 이를 그대로 억제하여 여전히 별거제를 지속할 경우 자연히 그들의 기분을 황폐하게 하여 물의를 일으킬 소지가 많을 것으로 보이므로, 오히려 그들의 요구에 선행하여 일정한 조건 하에 부부동거를 인정하기로 결정하고 19364월부터 이를 실시하고 있다. 현재의 동거자는 471쌍이나 앞으로도 증가의 경향에 있으나, 부부동거로 인해 그들 환자들의 기분이 매우 완화되어 자연히 도내(Ү)의 생활안정에 커다란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수용상황은 아래와 같다.

   부부동거자

  중앙리   39   구북리   194   서생리   6

  남생리   76   신생리   100   동생리   56

   471

 

 2. 부부동거의 허가표준

 1. 호적상 부부인 자

 2. 호적상 부부가 아니나 사실 정식으로 식을 올린 자

 3. 수용 이전부터 오랫동안 내연관계에 있던 자로 일반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자

 4. 5. 생략

 6. 이상의 각 항을 구비하더라도 이를 그대로 동거케 할 경우 격리수용의 의의를 몰각할 수 있으므로 미리 본인의 신청에 의해 단종법(정계수술)을 시행한 다음 동거시키도록 되어 있음(p.32-32).

 

 [부부환자동거자]의 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지만, 그 외에는 똑같은 내용의 기술이 1937년부터 41년까지의 {연보}에 실려있다.

 (-23)은 각 연도별 [부부환자 동거자수]를 나타낸 것이다.

구 분

중앙리

구북리

서생리

남생리

신생리

동생리

수용환자총수

 

1937년말

39

194

6

76

100

56

471

4,783

 

1938년말

41

196

31

75

101

61

505

5,025

 

1939년말

84

222

51

130

256

93

836

5,925

 

1940년말

84

222

52

130

256

93

840

6,130

 

비고 {1941년 년보} [부부환자의 동거] {1940년 년보}의 기술, 수치와 동일했다.

     부부환자의 동거는 1936년부터 단종법을 행한 다음에 동거시키도록 되어 있음

 소록도갱생원의 수용환자총수는 1937년말 4,783명이었던 것이 3년뒤인 1940년 말에는 6,136명으로 1,353명이 증가한다. 128.3%의 증가이다. 한편 [부부환자의 동거수]1937년말 현재, 471쌍이었던 것이 1940년에는 840쌍으로 불어나 그 증가율은 178.3%에 이른다.

 조선에서의 식민지 지배강화와 자원의 수탈은 조선인의 한센병 발병자를 증가시켰다. 한센병 발병자는 조선의 전 국토로부터 전라남도 남단의 소록도로 강제 수용되었다.

 수용된 가운데는 부부환자도 많이 있었지만, 부부동거의 조건으로서 [격리수용의 의의를 몰각할 수 있으므로]({소록도갱생원 년보}) 남성환자에게는 [단종]이 강요, 시술되었다. 그 숫자는 소록도갱생원 1940 {년보}의 공식적인 숫자만으로도 1940년 말에는 840쌍에 달하고 있다. 소록도갱생원에서는 [단종]이 부부환자의 동거조건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수용된 조선인 나환자에 대해 직원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반항적이었다, 도망을 기도()했다, 반일()적이었다라는 등의 이유로 요양소 안에 있는 감금실에 가둔 뒤 처벌로서의 [단종]수술이 강행되었다. 식민지지배를 받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조선인 한센병환자에 대해서는 한층 더한 잔학성과 비인간성이 가해진 것이다. 그것은 [의료] 관계자가 범한 범죄행위였다

 

 일본통치기에 만들어진 소록도의 감금소는 소록도병원 치료관에서 도보로 3분 정도 떨어진 수목들 사이에 세워진 해부실, 시체실의 건물과 함께 서 있다. 사방을 높이 3.5m정도의 붉은벽돌로 둘러싼 속에, 벽돌로 쌓은 2동의 감금소가 있다. 작은 창문에는 철격자가 끼워져 있으며 2동 사이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 그 감금소 앞에는 다음과 같은 이동()의 시가 걸려있다. 그는 간호장으로부터 소나무를 옮겨 심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친구가 급한 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친구를 업어서 치료실로 옮기는 바람에, 깜박 간호장의 명령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동()은 그 벌()로써 감금실에 감금되었다. 이 시는 출감한 날 [단종수술]을 받은 청년의 단장(Ө)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열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아물거린다.

             정관(η)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외면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앞서 소개한 {구회일처()} [단종]의 항을 보면, 1918년 전생()병원에서 근무한 뒤로 오랫동안 간호장으로 근무했던 카와시마()는 의사들의 부탁으로 70명이나 되는 환자들의 단종수술을 하고 있다. 소록도갱생원에서도 감금소를 출감할 때의 [처벌]로써의 단종수술은, 간호장 등의 의사가 아닌 직원들에 의해 행하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소록도갱생원의 간호장 가운데는 수의()로서 오랫동안 총독부 경무국 위생과에 근무했던 인물도 있다. 환자들이 단종수술을 받은 장소도, 감금실 바로 옆의 건물에서 시술된 것은 [처벌]로써 행해질 경우가 아니었을까? 현재 오오사카()에 거주하며, 전전()에는 소록도갱생원의 간호부로 있었던 분으로부터 [환자의 수정관 절제수술은 의사와 간호부가 치료본관의 수술실에서 행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부부동거를 위해 [본인의 신청에 의해 단종법(정계수술)을 행하는] 경우에는 치료본관의 수술실에서 행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환자의 단종수술 전부가 치료본관의 수술실에서 행해지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일본의 통치하에 행해진 한센병환자에 대한 [단종], 19458월의 해방이후에도 소록도에서는 계속해서 행해졌다. 1949(해방 4년 후)의 소록도갱생원의 수용환자 총수는 6,112명으로, 부부동거자수 959, 정계수술(단종)181, 출생아수 45명의 순이다. 그리고 그 10년 후인 1958년의 수용환자 총수는 5,583, 부부동거수 1,064, 정계수술 40, 출생아수 13명으로 되어있다.

 

1949

1950

1951

1952

1953

1954

1955

1956

1957

1958

합 계

수용환자 총인원

6,111

5,299

6,124

5,825

5,608

5,470

5,587

5,963

5,886

5,583

-

부부동거수()

 959

 967

  978

 984

 996

1,333

1,011

1,016

1,118

1,064

-

정계수술(단종)

 181

 175

  126

 206

  90

  116

 127

  71

  59

  40

1,191

출 생 아 수

  45

   1

    5

   4

   2

   27

  29

  23

  4

  13

 153

  {소록도갱생원 년보·1958} 국립소록도 갱생원에 의함(p.19)

 

부락명

중앙리

신생리

구북리

서생리

남생리

동생리

장안리

합계

 

세대수

306

348

212

105

179

123

 66

1,339

 

  1954년도 국립갱생원 {년보}에 의함(p.53-54).

 1954년도의 경우, 부부동거수에 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49년부터 58년까지의 10년 간에 소록도 한센병요양소에서는 1,191명이 단종수술을 받고 있다. 1945년의 해방 후의 원() 내외의 혼란으로 자유로운 성생활이 빈번히 행해지고, 일시적으로 단종수술이 중단되면서, 몇 년 동안은 매년 20명 내외의(1949년은 45) 아이들이 출생한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국가재정 실정으로 출생아의 수용재원을 염출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한편 해방 뒤의 자유사상의 발전은 인권옹호상 법적인 방법으로 [단종]에 의해 산아를 제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록도에서는 일본통치기에 취해왔던 관습에 의거하여, 일제히 부부동거자 중의 미시술자와 신규환자의 단종수술을 감행했다. 한센병환자에 대해 일본 의사들이 취해 왔던 [단종수술]이라는 [마이너스] 유산을 소록도의 한국 의사들은 해방 후에도 이어받은 것이다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몇 년씩이나 전쟁터에 끌려나가 계시던 아버지와 저는 거의 생활을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의 이미지는 어머니의 이야기로서 지금 남아 있습니다.

 농가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어머니와는 사이가 좋았던 어릴 적의 소꿉친구였답니다. 어머니와 신접살림을 차렸을 때 아버지가 신혼집으로 가져온 것은 석탄상자를 가득 채운 {와세다(ԫ)강의록} 등의 책뿐이었다고 웃으면서 어머니는 필자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너희 아버지는 밭에 나갈 때도 품에 책을 넣고 있다가, 틈만 있으면 책을 읽었단다. 고등과(고등소학교) 시절에는 교급장()이었지]라는 것이 어머니의 자랑거리였습니다.

 [에이지(, 필자)가 역사공부와 책을 좋아하는 건 아버지를 닮아서 인지도 몰라. 지금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너와 같이 역사여행을 하면서 기뻐해 주었을 텐데, 일찍 죽었으니 불쌍할 뿐이지]. 이 말은 3년 전 어머니가 98세로 돌아가시기 전에 필자에게 남긴 말씀입니다.

 부모로부터의 [생명]을 물려받아, 지금 필자는 살아있습니다.

 미츠다()를 위시한 [단종],[낙태]를 추진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부모로부터 자식에게의 [생명의 연계],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로부터 빼앗아 버렸습니다. 필자는 한센병과 관계를 맺으면서 처음으로 그 행위의 잔인함과 무참함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생명의 연계]를 부정한 미츠다()와 그 제자들이 범한 범죄적 행위를 인간으로서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미츠다() 일당의 그 행위를, 어머니 이야기의 추억과 겹쳐보면서, 지금 분노를 담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졸저 {[나 예방법]국가배상청구사건자료의 고찰(4)} 히로시마() 청구문고, 2000년 발행, pp.142-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