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의 인자함]의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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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총독의 소록도 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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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 의한 조선통치시대의 소록도 나요양소에 세 사람의 조선총독이 시찰을 위해 방문하고 있다 그 중의 한사람은 사이토 미노루(, 1858-1936), 19221122일에 [소록도자혜의원]을 시찰했다. 19162월 동() 병원의 창설로부터 6년 뒤의 일로, 조선 근대사상 최대의 반일 독립운동이었던 [3.1독립운동](1919)3년 뒤에 해당된다. 이는 소록도 자혜의원으로서는 제2대 원장인 하나이 젠키치() 시대에 해당한다.

 193563일에는 우가키 카즈나리(, 186811956가 시찰했으며, 1938915, 16의 양일 간에 걸쳐 미나미 지로(, 1874-1955) [소록도갱생원]을 시찰하고 있다. 이는 사이토() 조선총독의 방문보다 16년 뒤의 일로, 스호오()가 제4대 원장으로서 분발하고 있던 시기에 해당하며, 그 전년(Ҵ)77일에는 노구교(ϵ)사건으로 인한 중일()전면전쟁, 일본군에 의한 대륙침략이 대규모로 시작된 시대이기도 했다.

 이 세 사람의 조선총독의 [소록도]시찰에 추적해가면서, 조선총독부에 의해 행해진 한센병 환자에 대한 시책의 일단(Ӯ)을 살펴보기로 하자.

 

 [문화정치]를 표방한 사이토() 조선총독은 총독으로 임명된 직후인 1921923일부 {오오사카()아사히()신문·조선판}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고 있다

 

대체로 일본인은 나병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없다/사이토()총독의 서한의 일절

 사이토()총독은 광주주재 아사히()신문 통신원에게 한 통의 서한을 보내왔는데 그 일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광주).

 일본은 여러 문명국 가운데 유일하게 나환자에 대한 적당한 격리설비를 갖추지 못하고, 또한 그 치료발견의 위해서 여러 문명국과 함께 노력하고 있지 않는 나라이다. 이에 대한 주요한 이유로서는 자금의 결핍을 들 수가 있다. 동시에 부유한 자혜가(ʫ)들은 나병구제사업에 돈을 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자신이 나병 혈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기 싫어서, 또는 자신에게 나환자 친척이 있기 때문에 동정한다는 의심을 받기 싫어서일 것이다. 원래 나병을 치욕()으로 보는 관념은 전혀 합리적이지 못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태는 아마도 계속될 것이다.

 본인은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인들이 나병에 대하여도 정당한 태도를 보이는 날이 도래할 것을 기대한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일본의 나병환자 취급, 적당한 취급의 결핍은 국민적 치욕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운운().

 

 {오오사카()아사히()신문·조선판} 앞으로 사이토()가 위와 같은 서한을 보낸 12개월 뒤인 19211118일 아침, 사이토 총독은 마츠무라() 비서관, 후지나미() 통역관을 대동하고 열차로 서울 남대문을 출발하여 조선 남부시찰을 시작했다. 21일 낮, 자동차로 광주를 출발한 사이토 총독은 순천을 지나서 오후 4시 반에 여수에 도착한다. ({오오사카() 아사히()신문·조선판}1913318). 그 이후의 상황을 1124일부의 동()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22일 오전10시 구축함 쿠스노키()로 소록도 나병원에 도착, 환자를 위문했는데 환자들은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으며 총독은 위안설비비로 금일봉을 증정했다. 오후1시 다시 구축함으로 경남 통영()을 향해 출발했다. 총독의 이번 목적은 이 나병환자들을 위문하고 병원을 둘러보는 것이 제일 목적이었으나, 여수()는 옛날 조선해군의 요항()으로서의 유물(ڪ)도 적지 않아 감흥을 느끼게 했다(광주).

 

 옛날 조선해군의 요항()인 여수에서 [이번의 목적은 이 나병환자들을 위문하고 병원을 둘러보는 것이 먼저]라고 말하는 사이토() 총독. 소록도까지 구축함을 끌고 간 것은 해군대장의 직함을 가지고 있는 사이토()의 생각이었을까? 한편, 소록도자혜의원에 취임하기 전의 하나이()원장은 육군 이등군의정(중령에 상당)이었다.

 사이토 총독과 하나이 원장이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는 신문에도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3년여 뒤인 1926, 사이토()와 하나이에 의해서 소록도 [()]요양소의 확장공사가 계획, 실행되어 소록도의 3분의1의 토지가 조선나요양소의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어쨌거나 [문화정치기]의 한센병환자에 대한 시책과 관련된 한 장면이었다.

 

 사이토() 총독의 소록도 시찰로부터 5년 반 후인 1928516, 미키(߲ή)(목포거주의 형무소 근무자)는 소록도의 하나이 원장을 방문하고, 그 기록을 [나병의 섬을 방문하여]라는 제목으로 {조선 사법협회 잡지} 7권 제7(19287월호) 21-27쪽에 발표하고 있다. 하나이()는 그 다음해 10월에 소록도에서 병사(ܻ)하고 있기 때문에 미키(߲)의 기록은 만년(عҴ)의 하나이 원장시대의 소록도자혜의원의 모습을 살펴보는데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그 글 중의 일절을 다음에 소개한다.

 

 오전 10시쯤, 기선은 녹동에 도착했다. (중략) 수백미터의 수도(Գ)를 부선(ݲ)으로 소록도에 건너간 것이 오전 10시 조금 지나서였을까? 소록도는 엇비슷하게 박쥐의 날개를 편 듯한 형태의 섬으로, 소나무가 들어선 낮은 산들과 논, 보리밭이 펼쳐진다.

 오르막 위의 자혜의원 전용도로를 4-500미터 오르니 더위로 심장의 고동이 심해진다. 갈 길을 바라보니 길은 소나무 사이로 숨어버리고, 길가의 말뚝에 쓰여진 전라남도 소록도자혜의원이라는 글씨만 어렴풋이 읽을 수가 있다. 지지부진한 발걸음을 옮기기 300여 미터, 사무소에 도착하니 점심때를 지났다. 명함을 건네니 오늘은 개설기념일로 휴일이라며 원장관사로 안내해 준다.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숲을 지나 현관에 들어서서야 한숨을 내 쉰다.

 원장에게 물으니 오늘은 기념일로 환자들은 상품이 걸린 [대운동회]라고 한다. 당원()의 현재 수용력은 250명으로 내지인이 3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이며 여자가 30여명에 나머지는 모두 남자들이다. 중증환자는 10여명으로 모두 입원해 있다. 원장은 3등관인 하나이() 노국수()이며 그 밖에 젊은 의사가 3, 서기·약제사가 각 1, 여기에 간호원, 간병인(ܻ)이 각각 수명 그리고 순시용인()이라고 하는 큰 식구이다. 중증환자의 붕대교환에는 하루에 수 원()이 날아난다.

 주사는 일주일에 2번 정도이며, 경증환자는 땔나무를 하고 농경도 한다. 아직 어로()는 시작하지 않고 있다. 환자는 쌀, 보리가 관급(ί)이며 피복도 마찬가지다. 환자 한사람의 비용은 평균년액 2백원 내외이므로 환자들은 매일 즐겁게 생활하며 도주자도 없다. 매년 5, 6명의 전치퇴원자가 있으므로 모두들 희망에 차 있다(중략). 

 원장이 말하기를 내지(Ү) 나요양소의 통계에 따르면 도망자가 3,000여명이라 하나, 당소()에는 한 사람도 없다. 또한 성() 문제가 갈수록 곤란해져 스테릴리제이션(sterilization, 단종수술)이 행해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보시는 바와 같이 남녀수용사(ҳ)가 별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아무런 장벽도 없지만 성적이 좋다. 여기에는 2가지 의도가 있다.

 그 하나는 환자들의 자치제이다, 즉 한 집()의 환자 10명 가운데서 선거로 사장()을 정하고 그 위에 다시 계장()을 한사람 선거한다. 음식 기타의 다른 배급과 취사는 모두 각 사()의 자취이다. 또한 성의 고민에 대해서는 그들을 종교신앙에 귀의토록 하고 가장 귀의하기 쉬운 기독교를 도입했다. 목사가 월 1, 2회는 섬에 오며, 신자들은 매일 한번씩은 예배당에 모인다. 이렇게 하여 신자는 신자로서 그리고 무신자는 무신자로서, 서로를 경계하고 삼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건강한 부락과의 사이에도 아무런 장벽을 마련하고 있지 않으나 부락으로의 탈출자는 없다는 것이다(중략). 

 헤어질 때가 되어 노원장()이 말했다. 토지가 벽지()인 관계로 세상에 별로 소개되지 못해 위문자들도 적으며, 내지(Ү)와 같이 위문품도 모이질 않는다. 매일 2, 3명의 가족, 친족의 방문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다수는 생이별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위안방법에 고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타키오에이지(ڭ) {일본·조선 근대한센병사·고() 자료편} 히로시마() 청구문고(1999).

    p.74-77수록.

 

 

 6대 조선총독 우가키 카즈나리()가 소록도갱생원을 시찰한 것은 193563일의 일이다. {경성일보}는 평기자의 [우가키() 총독, 남조선 순시에 동행하여]라는 기사를 연재하고 있으며, 동년 621일부로 [우중()에 소록도 상륙/스호오()원장의 안내로 갱생원을 시찰]이라는 표제 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배는 맹렬한 비바람으로 엄청나게 흔들리면서 거문도 앞 바다를 남서()로 소록도를 향했다. 그리고 3일 아침10, 비를 맞으며 상륙. 스호오()갱생원장의 안내로 사무소를 찾은 제독은 사무실 한구석을 막아놓은 원장실에서 동원()의 경영상황과 기타 보고를 경청했다.

 벽에는 황태후의 어가(ʰ) [ĪŪ˪ʪƪʪ]) [무료할 때의 친구라도 되어 위로해 주시게 찾아보기 어려운 나를 대신해서]라는 의미의 와카(ʰ)(역주).

 

라는 노래가 걸려 있었다. 원장의 보고를 듣고 난 총독은 직원일동을 모아 훈시한 뒤, 자동차로 신축 중이던 중앙진료소에 들러 중증환자의 신병동과 환자제품 진열소를 시찰한 뒤, 다시 자동차로 원내의 각 부락을 시찰했다. 2천수백명의 환자들은 총독이 내방(۾)했다는 말에 옥외에서 환영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호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두 옥내에서 경의를 표했다. 그래도 경증환자 가운데는 비에 젖어 처마 밑 가까이에 서 있는 자들도 있었고, 국기를 들고 서있는 자들도 있었다. 혜택 받지 못한 그들이 얼마나 마음속으로부터 기뻐하고 있었는지는 이 한가지 사실로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일순()한 총독은 스호오()원장 댁에서 점심을 마친 뒤 1시 반경 소록도신사에 참배하고 2시에 사거()했다.

 

 총독부의 [어용신문] {경성()일보}의 기자다운 기사내용이다. 우가키() 총독은 소록도갱생원의 시찰에 앞서 1935215일에 기자단과 회견했다. {경성일보}(1935216일 석간)에 의하면 대충 회담을 끝낸 뒤 우가키() [여러분, 조선에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 3가지 있는데, 알고 있느냐]고 역습했다. 기자단으로부터는 지하자원이라던가 장진강(˰) 수력발전 등의 대답이 나왔으나 [그럴지도 모르지만 외국에는 더 좋은 것이 많다]고 총독은 수긍하지를 않았다. 그리고 우가키() 총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동() {경성일보}는 보도하고 있다

 

 [금강산. 흥남을 중심으로 하는 화학공업의 충실로 마그네슘, 정어리기름, 석탄액화, 화약, 대두()의 가공. 거기에다 자애()의 성과인 소록도이지].

 

 조선 전국토에서 강제수용된 조선인 환자들에게 있어, 우가키() 총독이 말하는 것과 같은 [자애의 성과인 소록도]란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콘도오()비서관, 토오고() 어용계(ͧ) 등을 대동하고 전라남도 시찰을 위해 서울을 출발한 것은 1938912일이다. 이틀 간의 제주도 시찰을 끝낸 미나미() 총독은 914일 오후 9시 반 경비선 금강환(˧)으로 제주도를 출발, 선중()에서 일박()했다.

 다음날인 15일 오전 여섯시 총독일행을 태운 금강환(˧)은 소록도 선착장 앞 바다에 닻을 내렸다. 스호오()원장 및 요시자키()서무과장은 2척의 란치(launch)로 금강환까지 마중을 나가 즉시 부두에 상륙, 동소()에 정렬한 전() 직원가족, 초등학교 아동, 유치원 아동 등, 300여명의 마중을 받은 뒤 일행은 원()의 자동차로 소록도 신사에 참배하고 기념식수를 한 뒤, 원내 구락부에서 아침밥을 들었다.

 

 미나미()가 조선총독이 된 것은 193685일이다. 1929년의 조선군사령관, 34년의 관동군사령관을 거쳐서의 취임이었다. 미나미() 총독은 조선인들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 [내선일체(Ү)]라는 동화정책을 강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89월 소록도 갱생원의 조선총독 시찰에 관해서는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꽤 많이 남아있다. 소록도갱생원 {1938년 연보}(193910), [미나미() 조선총독의 원내시찰],[환자에게 훈시중의 미나미() 조선총독], [미나미()총독의 구북리에서의 환자작업 시찰]3장의 사진을 책머리에 싣고, 3쪽을 할애하여 [미나미 조선총독의 내원()]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정부의 [어용신문] {경성신문}915일부터 연 3일간 미나미 총독의 소록도 시찰을 보도했다. 더욱이 104, 5일의 양일에는 [소록도를 본다]는 제목으로 오오츠() 특파원의 [미나미총독 시찰수행기]를 연재했다. 이들 자료를 살펴가면서 소록도에서의 미나미 총독의 언동()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조식을 끝낸 뒤 오전 830분 사무본관에서 스호오()원장으로부터 원무()상황을 들은 뒤, 고등관 이상의 접견을 끝내고, 계속해서 회의실에서 전() 직원 및 그 가족 300여명에 대해 다음과 같은 훈시를 했다

 

 [지난 5월 당() 원장이 상경했을 때, 황송하게도 황태후폐하를 뵙게 될 영광을 얻어, ()원의 상황을 친히 하문()하심에 원장이 감격공축(̭)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나, 이러한 일은 실로 전례가 없는 것으로 이 사업이 인류박애라는 점에 있어서, 적자()들에 대한 심원한 사려()에 대해서는 오로지 황송할 따름으로 총독 이하 일동은 깊이 감격하여 그 뜻을 받들어 모셔 정진()할 각오이다. 원장을 중심으로 하여 원내(Ү)의 직원 여러분들도 정신적으로는 신사()를 중심으로 황국신민임을 잊지 말고, 국민으로서 정신지도에 마음속으로부터의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정려()하라]

 미나미() 총독의 훈시가 끝난 뒤, 스호오()원장의 선창으로 일동() [황국신민의 맹세]를 제창했다.

 1. 우리들은 황국신민으로 충성으로서 군국()에 보답한다.

 2. 우리들 황국신민은 신애협력()함으로서 단결을 굳게 한다.

 3. 우리들 황국신민은 인고단련(Ӵ֡)하여 힘을 기름으로서 황도(Գ)를 선양()한다.

 

 시찰단 일행은 순서에 따라 카지와라(ڲ) 교장의 선도()로 소록도 초등학교를 향했다

 아동 121(조선인 40)이 정렬한 앞에서 미나미 총독은 훈시했다

 [매일 황국신민의 맹세를 제창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훌륭한 국민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훌륭한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매일 제창하고 있는 황국신민의 맹세를 지키기만 하면 된다. 알아들은 사람을 손을 들어 보라] 아동 일동은 일제히 거수한다. 교장의 선창으로 [황국신민의 맹세]를 제창한다.

 1.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쳐서 천황폐하에게 충성을 다합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Ӵ֡)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황국신민의 맹세]193710월에 제정된 것으로 어른용과 아동용이 따로 있어, 직장이나 학교의 조례() 등에서 전원에게 제창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총독은 초등학교에 인접한 유치원을 시찰한 후, 자동차를 타고 [병동지대]의 시찰에 들어갔다.

 환자의 송진채취 현장에 둘러보고, 구북리 검문소 및 환자들의 작업을 시찰한 후, 형무소에 도착, 마츠다이라() 광주 형무소장으로부터 사무개요를 보고 받았다. 남생리를 거쳐 소록도 신사()의 분사()에 참배한 뒤, 중앙공회당, 산 위의 종루, 납골당, 신생리 검문소, 환자매점 등을 차례로 시찰하고 중앙운동장에 도착했다.

 

 총독시찰에 수행한 {경성일보}의 오오츠() 특파원은 104일자 [소록도를 본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전도()의 환자 4,700명 가운데 부부동거자는 471쌍으로 즐거운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1917년 개원 당시는 태어날 미감(ڱ)아동의 불행을 생각하여, 부부는 별거하면서 치료를 받고 있었으나 성적()불만으로 인하여 기분이 거칠어지고 물의(ڪ)와 추한 분쟁이 계속해서 일어나 섬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도화선이 된 쓰라린 경험에 생각하여, 스호오()원장의 영단으로 1936년부터 부부동거를 인정했다. 그 대신에 불행한 자손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남녀의 정형수술을 성생활의 조건에 부가했다. 처음에는 이 수술도 일부 환자의 미신 때문에 한 때는 시끄러웠으나 그 진상이 알려진 지금은 환자 쪽으로부터 계속해서 주문을 신청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경증의 환자 가운데, 호적상의 부부가 아니더라도 각 병동의 사장()이나 유력환자 몇 명이 증명하면, 환자 서로간의 결혼이 허용되어 있으므로, 요즈음에는 남녀문제로 다툼이 일어난 적은 없다고 한다.

 

 중앙운동장에 모인 환자 3,700여명에 대해 조선총독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훈시를 했다. 통역은 오순재()가 담당했다.

 

 원장()으로부터 소개받은 미나미() 대장()이다. 원장이 말한 것처럼 오늘 제군들을 위문하고 제군들의 일상생활이 어떤가를 시찰하기 위해서 왔다. (편한 자세로 들어라)

 총독도 원장도 전부 천황폐하의 적자()이다. 여기에 모여 있는 제군들이나 우리들 모두가 천황폐하의 적자이기 때문에 총독도 제군들도 일본신민임에는 차이가 없으며, 따라서 제군들의 병에 대해서는 폐하께서나 우리들이나 모두 우리들의 형제자매가 병이 든 것과 마찬가지로 동정한다.

 이번 사변(ܨ)에 대해 제군들이 보여준 적성(), 예를 들자면 전쟁터의 병사들보다 많은 것을 먹을 수는 없다고 하루에 여섯 홉을 다섯 홉 반으로 감해주기를 원하는 것 등이 그 표현이며, 또는 무엇인가 국가를 위해 힘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서 저금을 내놓는다거나 노동으로서 등대()를 만드는 등의 일은 일본국민정신의 표현이다. 이러한 제군들이 적성()을 원장인 스호오()가 황태후폐하에게 주상(߾)하여 황송하게도 많은 칭찬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총독을 위시한 조선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일본국민임을 무상의 영광으로 여기며 이를 위하여 소중한 목숨을 바쳐 봉공()하고 있는 것이다. 제군들 역시 일본신민다움을 정신상의 목표로 하여 기쁨으로써 갱생원의 지도에 따라야 할 것이다. 오늘 각 부락을 둘러보았지만 각 부락 모두가 청결할 뿐만 아니라 각 부락에 할당된 토지에는 갖가지 것들이 재배되고 있었다. 이는 아무런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명이다. 인생에서 물질적, 정신적으로 가장 유쾌한 것은 부락 내에서 부락과 부락이 사이좋게 생활하는 것이다. 갱생원을 평생 영주()의 땅으로 생각하는 것은 제군들의 가장 행복한 일이다. 왜냐하면 원장을 비롯한 직원 전부가 생명과 고락()을 함께 하면서 평생을 그것을 위해 진력해 왔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여 말하자면 다음의 2가지이다.

  그 하나, 정신적으로 황국신민 됨을 기뻐할 것

  그 둘, 동포가 서로 친하게 일하며 사는 것({1938년 연보} p.3-4). 

 

 총독의 훈시가 끝난 뒤 환자일동은 [황국신민의 맹세]를 제창하고 환자대표 이종규(Ц)가 답사를 했다. 그 뒤 총독일행은 치료본관 내의 여러가지 시설들을 시찰하고, 오전11시 반 원내의 시찰을 종료, 정오에 숙사인 [갱생원 구락부]로 돌아갔다.

 저녁에는 해변에서 낚시를 즐긴 다음 섬의 [구락부]에서 일박하고, 다음날인 16일 오전7시에 총독일행은 [선착장 부두에 정렬한 직원, 생도(), 기타 일동의 환송을 받으며 소록도를 뒤로 했다. 벌교·광주를 경유하여 유성 온천에 들러 일박한 뒤, 다음날인 17일 오후 033분 대전발 [노조미()]호로 서울로 귀경했다.

 소록도 갱생원의 제3기 확장공사가 27만여원의 예산으로 착공된 것은 다음해인 19391월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