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皇室)의 인자함]의 의미하는 것    

 


2 소록도의 제2·제3기 확장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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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갱생원의 제1기 공사 낙성식은 조선나예방협회 주최로 한센병환자 3,000명 수용의 신축시설과 설비가 완성된 19351021일 갱생원 내에서 거행되었다.

 낙성식 당일, 우시지마(牛島)내무국장이 우가키(宇垣) 총독의 고시(告示)를 대독(代読)했다.

 소록도갱생원 {1935년 연보}(193610월 발행)에 게재된 사진을 보면 확장공사 완료를 시찰하기 위해 조선총독 우가키(宇垣一成) 자신도 소록도갱생원을 방문하고 있다. 조선총독부발행 {조선}254(19367월호) [일지]에 의하면, 우가키 총독은 동년 6월 조선남부의 시찰하고 있으며 동년 63일에 소록도갱생원을 방문했다.

 우가키 조선총독은 19351111 [각지의 나요양소 원장이 오오미야(大宮) 어소(御所)를 방문]했을 때, 황태후가 소록도갱생원 등에 [하사금]을 내린 것에 관해 {조선}(193512월호)에 다음과 같은 [총독 근화(謹話)]를 발표하고 있다.

 

 [가엽게 여기시는 인자함을 보여주시어 1930년에는 관공사립요양소에 5개년 계속해서 다액의 하사금을 받았습니다만, 이번에 거듭 환자구호, 위안을 위한 제반 설비를 위해 소록도갱생원에 일시금(一時金)을……하사(下賜)하셨다는 말씀에는 거듭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얼마 전 소록도갱생원의 수용시설 낙성의 상황을 들으시고 몹씨 기뻐하셨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우리들은 그 고마우신 마음을 명심하여 본 사업을 위해 한층 더 분투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 바입니다(p.126).

 

 소록도갱생원의 제1기 확장공사(1933년도부터 3년간 계속사업, 공사비 1,155,969)가 완료된 데 이어, 2기 공사(193612월에 착공하고 약10개월로 완료, 예산 71,540), 그리고 제3기 확장계획이 수립되어 총공사비 271,380원으로 19391월에 기공되어, 동년 10월 하순에 예정공사가 완료되었다.

 전후(前後) 3회에 걸친 대확장공사에서 소록도에 수용된 한센병환자들이 어떻게 사역(使役) 당했는지에 관해 언급하기로 하자. 특히, 2기 확장공사의 중반은, 노구교(蘆溝橋)사건을 계기로 중일(中日)전면전쟁이 발발한 시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물가가 점차적으로 앙등(昂騰)함에 따라 조선나예방협회의 기금도 제1기와 같이는 모이지 않았다. 따라서 자연히 확장공사는 수용환자들의 노동에 의거하게 되었다. 이 사실에 대해 소록도갱생원 {1939년 연보}(19408월 발행)에서 갱생원장 스호오(周防)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총독부에서는 이들 부랑환자를 일소(一掃)하기 위해 다시 제3기 확장계획을 수립하여……금년 1월에 착공했습니다만 때 마침 지나(支那)사변 3년째에 상당(相当)하여 철재, 목재, 시멘트 기타 모든 건축자재의 폭등은 말할 것도 없고 군수관계로부터 이들 자재의 입수가 지난(至難)의 상태에 이르러……엄청난 날짜와 다액의 경비를 요하는 한편 건축에 종사하는 기술자와 일꾼들의 수급도 여의치 못한 등, 모든 면에서 극심한 곤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중략)

 건축부지 기타 토공(土工)에 속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관사지대는 도내(島内) 전 직원의 봉사작업으로 이를 담당하고 병동지대에서는 경증환자를 총동원하며, 특히 금번 공사 중 최대의 난관이라 할 수 있는 병사지역의 부두(埠頭)와 같은 것도 직원 및 환자가 공동으로 주야 돌관공사를 진행함으로서 경비의 절감을 꾀하고 재료등귀(騰貴)에 대한 공사예산의 부족을 보충하는 등, 모든 비상수단을 다한 결과, 겨우 예정대로 금년 10월 하순에 대체로 예정공사를 완료하여 10월 하순부터 11월 상순에 걸쳐 새로운 환자 1,000명의 증원을 마침으로서, 현재 갱생원의 환자수는 실로 2,600명이라과 하는 많은 수를 헤아리기에 이르렀습니다(p.8).

 

 스호오(周防)원장이 [금번 공사 중 최대의 난관]이었다고 하는 병동지대 [부두축조]에 관해 소개하기로 하자. {1939년 연보}에 게재된 아래의 사진(동생리에서의 환자의 작업풍경)에 당시의 환자들이 일하고 있는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소록도 연안은 주위의 수심이 대부분 얕기 때문에 선박의 입항이 지극히 불편하여 건축자재를 비롯하여 환자의 식료, 땔나무나 연탄 그 밖의 물자 양육(揚陸)에 다대한 노동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적절한 부두를 축항하기 위해 소록도 갱생원에서는 섬 안의 장소들을 상세히 조사하고 있던 중, [병사지대]인 동생리와 남생리의 중간에 적절한 바위 밭을 발견했다. 그리고 1939112, 노동에 견딜 수 있는 환자들을 총동원하여 직원들의 감시와 지휘 하에 병사지대의 부두 공사에 착수했다.

 공사는 부두 및 이에 부수되는 호안(護岸) 겸 도로를 포함해 그 연장이 도합 약 600m에 달했다. 바다 속으로 돌출한 부두 부분은 조류가 심하고, 폭풍시의 노도(怒涛)가 심하기 때문에 견고함이 필요했으므로 모두 큰 석재를 사용했으며, 수중에 묻히는 부분은 특히 거대한 돌(1개의 중량이 1-3ton)들을 사용했다. 이에 대해 소록도갱생원{1939년 연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역장은 토사(土砂)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암석만을 사용하여 그 석재의 총량은 실로 2,700입방평에 달했으며, 그 운반을 비롯하여 축조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기계류를 사용하지 않고 그것도 아무런 경험도 없는 환자들의 손에 의해 착공 이후 주야겸행(兼行), 불면불휴의 노력을 계속하여 불과 220일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완성했다. 만일 본 공사를 민간청부에 의할 경우 거액의 경비와 오랜 기간을 필요로 했을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며, 해당공사는 당원의 건설사업을 시작한 이래 특필할만한 대공사로서 특히 환자들이 노력봉사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점에 가장 깊은 의의가 있으며,……환자출역 연인원 96,583(p.12).

 

  [부두공사]에 대해 19889월에 발행된 대한나관리협회의 {한국나병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19394, 27만원의 예산으로 제3차 확장공사가 시작되었다. 맨 처음 착공한 것은 동생리 선창공사였다. 직원지대에도 선창 설비가 되어 있었지만 많은 물자를 나르기에는 병사지대까지의 거리가 멀어 불편하였고, 더욱이 일이 있을 때마다 환자들이 출입하는 것을 직원들은 못마땅히 여겨 왔었다. 동생리 연안은 수심이 깊어 큰배도 능히 접안(接岸)할 수 있고 병사지대이기 때문에 하역작업에도 아주 유리한 곳이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여기에다 물자 집산의 거점을 삼기로 한 원() 당국은 또 다시 총동원령을 내려 남녀노소의 할 것 없이 기동(起動)할만한 환자는 모두 출역(出役)시켰다. 바윗덩이 같이 큰돌은 목도로 운반했으며 부녀자들은 잔돌을 나르느라고 개미처럼 움직였다.

 때로는 조수(潮水)관계로 새벽이나 밤중에도 작업은 진행되었다. 5백미터나 되는 해안선을 따라 길을 내고 석축을 하는데 대낮처럼 밝힌 전깃불 아래서 조금물 때를 맞춘 야간작업은 자정까지도 계속되었다.

 수간호장이나 간호장은 채찍을 휘두르며 작업을 독려했고, 그 밑에서 환자들은 뼈를 깎는 고통을 견뎌냈다](p.108).

 

 여기서 말하는 [간호장(看護長)]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대한나관리협회의 {한국나병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원장은)…… 또 보다 효과적인 환자통제를 위해 각 부락에는 간호수 1, 간호부 1, 농사감독, 비품(備品)감독, 서기, 조수 각 1명씩을 거느리는 간호주임(간호장)을 책임자로 두고, 그 밑에 다시 비품조수 1, 작업조수 34, 반장 2명을 거느리는 환자대표를 두었다.

 환자 위에 군림하며 거의 절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간호주임은 대개 은급(恩級)이 붙은 전직경찰이거나 헌병경력을 가진 일본인이었고, 그 밑의 환자 조무원은 일어에 능한 사람들이었다. 간호주임의 가운데서 사토 미요지(佐藤三代治)는 스호오(周防)원장이 가장 신임하는 심복부하였다](p.105).

 1기 확장공사를 순조롭게 끝낸 스호오(周防)원장은 그 경험을 활용하여 일본어가 능숙하고 친일적이며, ()운영에도 협력적인 박순주(朴順周), 이종규(李宗揆) 두 사람을 환자고문으로 두고 그들을 통하여 목적을 달성하려했다.

 

 199689일 오후, 필자는 송()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대구에서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한 음향기술자 조행선(趙行善)씨와 함께 중앙리에 있는 중증장애자들이 사는 부부병동을 방문했다. 그 때의 송할머니와 필자의 대화의 일부분을 소개한다.

 

 [할머니는 언제, 몇 살 때 소록도로 왔어요?]

 [소화(昭化)16(1941), 16살 때야]

 그러니까 필자보다 5살 위로, 72세인 셈이다.

 [사토 미요지(佐藤三代治), 쿠로사토(さとう, 흑사탕이란 의미)는 덩치가 큰 남자였나요?]

 [아니, 보통 덩치였어, 그렇지. 여기 이 조()사장님 정도의 몸집이었을 게야]

 [이야기 해 본적은 있으세요? 환자들에게 어떤 짓을 했나요?]

 [만나서 이야기했지. 아주 나쁜 놈이야. 환자가 밖에서 소변보는 것을 보면 화를 내고는 바로 감금실에 가두곤 했지. ……감금실에서 나올 때는 수술(단종수술)을 당하지]

 환자들이 집밖에서 소변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감금실에 가두고 그 처벌로써 단종수술을 받게 했다는 데는 놀라고 말았다.

[스호오(周防는 덩치가 컸습니까?]

[키가 큰 사내였어]

[스호오(周防), 나쁜 사람이었어요?]

[아니,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어]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씨도 [나쁜 것은 간호장인 사토(佐藤三代治)이지 스호오(周防)원장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요. 당시에 소록도갱생원에서 생활했던 환자들에게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라고 한다. 필자는 항상 소록도갱생원의 스호오(周防)원장을 [한센병 환자의 강제수용, 절대격리, 단종수술을 강행]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또 그렇게 논()해 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소록도 한센병요양소의 중앙리에 있는 중증 장애자병동에서 반세기 이상을 살고 있는 송할머니도, 그리고 오랜 동안 한센병환자에 대한 자원봉사활동을 해온 조()씨도 [나쁜 것은 사토(佐藤)이지 스호오(周防)원장은 좋은 사람이었다…]라고 한다. 필자와 송할머니, 그리고 조()씨 등의 스호오(周防)원장에 대한 평가의 차이, 갭을 어떻게 메워야 할 것인가?

 [할머니는, 스호오(周防)원장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으세요?]

 [스호오(周防)원장은 멀리서 본 적은 있지만 이야기를 한 적은 없어. 원장과 환자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신분이 틀려. 어떻게 같이 이야기를 해].

 

 필자는 스호오(周防正季)와 사이토(斎藤三代治)의 관계를 알아보고 싶었다. 조선경찰신문사가 발행한 {조선경찰직원록}(192510) [경기도 위생과]의 항을 보면, 과장은 스호오(周防)로 되어 있으며, 같은 과내(課内) [경찰 수의무(獣医務)촉탁, 월급 60, 사이토 미요지(斎藤三代治), 오오이타(大分)]라고 기록되어 있다.

 1925년이라면 스호오(周防)가 아이치현(愛知県) 기사로부터 조선총독부기사·경기도 위생과장으로 발령 받은 4년 뒤이다. 스호오(周防)는 경기도 위생과장에 부임하자 곧 사이토(斎藤)를 경찰수의무 촉탁으로서 자신의 부하로 채용한 셈이다. 19301월 발행의 동() {조선경찰직원록}에는 [경찰 수의무(獣医務)촉탁, 수당70, 사이토 미요지(斎藤三代治), 오오이타(大分)]로 되어 있으나, 193212월의 직원록에는 경기도 위생과에 사이토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다른 곳으로 전근한 것이리라. 그러나 1942년의 {조선총독부 직원록} [나요양소 소록도갱생원]에는 5명의 간호장 가운데 필두(筆頭) 간호장으로서, 그리고 유일한 고등관 5등으로서 사이토의 이름이 올라있다.

 앞서 소개한 {한국나병사}에 의하면 [사이토(斎藤)는……어려서 고아가 된 그를 스호오(周防)가 일찍부터 양자로 삼아 수의(獣医)학교를 졸업시켰으며 경기도 경찰부 위생과에 근무하면서도 부하로 데리고 있다가 불러들였던 것이다](p.105-6)라고 되어 있다.

 

 2기·제3기 확장공사를 거치면서 수용환자수는 1935년 말의 환자수 3,733명으로부터 병사(病舎)의 증설, 건설 등으로 1940년 말에는 실로 6,137명으로 불어난다. 이러한 병사 건설 등이 환자들의 극심한 강제노동에 의해 행해졌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 나가시마(長島) 애생원의 미츠다(光田健輔) {애생}(194010월호) [소록도갱생원 참관]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하고 있다.

 

 (소록도갱생원의) 수용나환자가 6,000, 남자 4,118, 여자 1,882명이다……. (요컨대) 결국 세계 제일이라고 하는 필리핀의 [크리온]과 비교하여 수용인원 같지만 그들의 환자 주택은 변변치 못한 오두막이 대부분으로 큰바람이 한번 불면 날아가 버리는 종려 잎으로 지붕을 이은 집들이다. 갱생원은 작은 가옥이라고는 하나 견고하게 지어진 벽돌집이다. ……다년간 외국인으로부터 우롱 당해온 우리나라(일본)의 구라(救癩)시설이 조선과 대만에서 확기적으로 발달하여 능률을 올리게 된 것은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다.

 

 1939118일부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소록도갱생원 나병자가 도주

【고흥】사람마다 두려워하고 저주하는 무서운 천형병이 불행히 보였으나, 나환자의 요양소는 천하의 제일이라는 소록도갱생원에 수용되어 수많은 동무들과 아무런 부족불만이 없이 유쾌히 공동생활을 하고 있음은 나환자로는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이상적 낙원이라고 칭한다. 이 좋은 곳에서 그 무엇이 불만하였든가 지난 10일에는 환자 10명이 결속, 도주하였는바 2명은 체포되고 8명은 부산방면으로 도주한 형적이 있어 부산경찰에 의뢰하야 수사 중이라고 한다.

 

 소록도갱생원 {1941년 연보}(1942425)에는 [개원이래 수용환자의 전귀(転帰) 및 이동별표(194112월말 조사)]라는 제목의 통계가 게재되어 있다. 즉 소록도에 한센병요양소가 개설된 다음해인 1917년부터 1941년까지의 [치료퇴원, 경쾌(軽快)퇴원, 사고퇴원, 사망, 도주]의 인원수가 연차별·성별로 표기되어 있다.

 [도주]의 항을 보면 1921년에 2명의 도주자가 나타나나 1932년까지는 [도주]난의 인원수가 [없음]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아래의 표에는 193341년까지의 [도주]인원만을 정리했다.

 참고로 1933년은 [조선나예방협회]가 설립된 해이다.

도주

년 도

1933

1934

1935

1936

1937

1938

1939

1940

1941

합계

남 자

1

9

65

54

17

24

13

31

76

290

여 자

0

0

2

6

0

1

0

1

10

20

합계()

1

9

67

60

17

25

13

32

86

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