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의 인자함]의 의미하는 것


3 황태후 사다코()와 스호오 마사스에()

--------------------------------------------------------------------------

              1           

 {우가키 카즈나리() 일기}(미스즈ۮ, 1935713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실려있다

 [13일 오오미야() 어소()) 오오미야() 어소() : 오오미야란 황태후를 의미하는 존칭이며, 여기서는 정명(٥)황후가 생활하던       궁궐을 가르킨다. 토오쿄의 구 아카사카() 이궁() 안에 있었다(역주).

를 방문, 황태후폐하를 배알하고 조선의 사회사업, 그 중에서도 나()예방과 환자퇴치에 관한 상황을 약 20분간에 걸쳐 설명 드림. 갖가지 위로와 장려의 고마운 말씀을 듣고 퇴소. 선어()의 하사가 있었음({우가키() 일기2} 미스즈ۮ, 1970, p.1023)

 

 우가키 조선총독이 오오미야 어소()로 황태후를 배알하고 [조선에 관해 하문을 받은 일은 이전에도 있었다. 193178일자에 [여러가지로 필자의 건강, 조선의 사정에 관해 하문이 있었으며 위문의 고마운 말씀을 듣고 퇴소]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언제부터 황태후 사다코()가 한센병 전반에 관여하게 된 것일까. 시마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명(٥)황후(황태후 사다코)가 일본의 나()사업 전반에 관여하게 된 경위에 관해서는 내무성으로부터의 작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측근이었던 카케이(??) 전 황태후궁직() 사무주관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정명(٥)황후의 구라(ϭ)에의 마음가짐은 1930년 당시의 내무성 지방국장 츠기타(߲)의 헌책()에 따라 내무대신 아타치(ӹ)가 출원()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활발해지게 된 것이지만]({창립30주년지} 등풍()협회, 1983). 

 츠기타()가 어떤 경위로 그러한 헌책을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미츠다()를 비롯한 당시의 정책 추진자들은 예방사업 발족당초의 부분적 격리정책을 선회하여 전면적 격리를 입안(ء)했지만, 재원의 획득에 곤란을 겪어, (중략) 1930년 황후(황태후 사다코)께서 소지금 248,000원을 나()사업을 위해 하사한 것은, 사업의 확장추진에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격려가 되었다. 그들은 일제히 황실이 깊은 은혜를 내외에 알리고, 하사금 중의 10만원을 기금으로 하여 현안()이던 [나예방협회](초대회장 시부자와(߻))를 발족시켰다(시마다()유고집 {}, , 1996, p.120-21).

 

 세키야(μ߲) 전 궁내청 차관도 193445, [황태후 폐하의 인자하심과 나예방사업]이라는 제목으로 교순사()에서 다음과 같이 강연하고 있다.

 

 소화()5(1930)에 들어 전 궁내(Ү)대신인 이치키() 남작을 부르셨습니다. 그 돈(절약한 경비)이 상당한 금액에 달하고 있으니 그 것을 나예방사업 쓰고 싶다이리하여 19301110, 당시의 내무대신 아다치(ӹ), 척무대신 마츠다(), 이 양 대신을 오오미야() 어소()로 불러 하사금에 관한 말씀이 계셨습니다. 첫째는 곧 설립되어야 할 나예방단체, 즉 지금의 나예방협회에 대한 하사금, 둘째로는 일본국내의 사설요양소에 대한 하사금, 즉 내지(Ү)에 여섯 개, 조선에 세 개, 대만에 하나, 정확히 10개소의 사설요양소에 대해 해마다 하사금이 있다는 것, 세 번째는, 당시에는 관립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만, 공사립 요양소 직원에 대해 물품과 돈을 하사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원장등에게는 은제() 화병, 의원이나 사무원 또는 간호원들 중에서 오랫동안 요양소 방면에서 고생을 한 사람들에 대하여는 벼룻집을 하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환이나 불목하니 등, 오랫동안 요양소에서 근무한 사람들에게는 과자값을 하사하셨습니다. 이처럼 세심한 배려를 저는 여태껏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사하신 물품을 장식하고 있는 문양(ڣ)이 정말 고마운 것입니다. 그 문양은 소헌()황태후(명치천황의 부인인 하루코(ڸ))가 사용하던 문양이라고 합니다.

 궁중에는 표식이 있어서, 대나무 표식, 매화 표식, 소나무 표식도 있습니다만, 소헌()황태후는 신엽()의 표식이었다고 합니다. 그 하사물품에는 황태후 폐하께서 직접 디자인한 단풍의 신엽()이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소헌()황태후에 관한 기념사업이 없었으므로 이 사업을 소헌황태후의 사업으로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고 하며, 하사품도 소헌황태후의 표식으로 장식해, 완전히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p.2-5).

 

 한센병요양소인 시즈오카현(˪) 고텐바()에 있는 카미야마(ߣ) 부생병원 원장인 이외시타() {조국의 피를 정화()해라}(19376, 칸사이(μ)MTL 발행) 속에서 황태후 사다코()의 하사품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19351110일 오오사카() 아사히()신문사에서 행해진 [은혜의 날] 기념강연회에서의 강연내용의 일부이다. [은혜의 날]이란 황태후 사다코가 오오미야 어소()의 가회(ʰ)) 우타카이(ʰ) : 일본궁중의 신년의식의 하나로 1월 중순에 행해진다. 전해(Ҵ)에 미리 제목을 정해놓고 당      일에는 천황, 황후, 황족들의 영가(ʰ)와 함께 일반인들이 바친 우수한 와카(ʰ)도 발표된다(역주).

에서, 앞서 소개한 [ĪŪȪʪƪ]라는 와카(ʰ)를 읊은 날이다. 이외시타()는 고(ͺ) 레제신부의 뒤를 이어 카미야마 부생병원의 원장이 된 분으로 경건한 기독교(카톨릭)신도였다.

 

 재작년 528, 소헌()황태후의 탄신일에는 정식으로 이리에(˰)태부() 각하를 파견하시어 오오미야 어소()의 단풍나무 묘목을 하사하셨습니다. 황태후폐하께서는 자선()을 행하실 때는 언제나 소헌황태후의 이름으로 하십니다. 이것은 소헌황태후가 생전은 다망했던 까닭에 자비의 마음을 충분히 나타내시지 못한 것을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효심()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단풍나무 묘목과 함께 7수의 노래(ʰ)가 보내져왔는데 그 대체적인 의미를 말씀드리면,

               이 단풍잎은 소헌황태후의 문장(ڣ)이다. 그러므로 이를 받아 소중히 가꾸어 성장한 다음       에는, 여름에는 이 푸른 잎 그늘에서 휴식하고, 가을에는 단풍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소헌   황태후의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하라. 이처럼 그대들이 위로 받는 것을 소헌황태후께서는 기   뻐하실 것이다.

라는 따뜻한 마음이 베어있는 것입니다. 또 돌아가실 때는 백색 레그홍을 스무마리나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헌상하신 분들의 뜻을 어여삐 여겨 어소()로 가지고 가신 것이라 하나 이것이 지금은 백 마리 정도로 불어나 병원의 환자들이 그 달걀을 받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황태후(황실)의 인자하심]을 행정관계자들은, 방송·출판·레코드 등을 통해서 내외에 캠페인을 벌렸다. 1932625, 황태후 사다코의 생일인 그 날을 [()예방 데이(day)]로 정하고 625일을 중심으로 일주일간을 나예방 주간()으로 하여 전국각지에서 강연회 등 [구라운동]을 행하게 되었다({구회일처()}).

 국립요양소인 나가시마 애생원의 의무과장, 하야시(, 1900-47)는 같은 해인 19326월의 [나예방주간]에 오오사카 방송국에서 [()를 구하는 세가지 힘]이라는 제목의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본인은 오늘 [()를 구하는 세 가지 힘]이라는 제목을 붙여놓았다. 그 첫째는 무엇인가? 1930, 황태후폐하께서 나()를 위해 내탕금(Ү) 248,000원을 하사하셨다. 더군다나 이 돈은 황송하게도 폐하께서 쓰시는 제반경비를 절약하여 만드신 것이다. 우리들 국민으로서 가장 존경하는 황실과 황태후폐하가 일본에서 제일 학대받고 유린되고 있는 나환자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셨다. 이는 나()구제의 커다란 힘이다. 이번 625일은 폐하의 생일이다. 우리들은 이날을 은혜의 날로서 기억하고, 또 그 전후 일주일간을 나()운동주간으로 삼아 많은 사람들에게 폐하의 인자함과 나()구제의 급무()를 외치는 것이다. 이러한 황실의 은혜는 나()를 구하는 첫 번째의 힘이다(시오누마() {하야시 후미오() 유고집} 1959).

 

 하야시()도 경건한 기독교인(프로테스탄트)이었다. 그는 나가시마()애생원의 의무과장으로부터 193510월 카고시마현()에 신설된 국립나료양소 호시즈카() 경애원장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36515, 스스로 편집한 {성좌()} 1집 건설편(호시즈카 경애원 위안회 발행)의 첫머리에 [아름다운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쓰고 있다.

 

 본원()과 같은 요양소가 신설된다는 것은, 황태후폐하를 비롯한 황실의 은혜 없이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더구나 본원과 같이 개원하자말자 천재일우의 영광을 얻은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1028일 개원식을 올린 뒤 불과 2주일 뒤인 1111일에 시종()을 보내오시는 영광을 입었으며, 같은 날 같은 시각, 즉 오전11시에는 오오미야 어소()에서 하사금 3,000원을 하사받은 것이다. 그러나 마침 추계특별 대연습지인 카고시마(), 미야자키현()은 연습지의 환자들을 일소하기 위해, 연습전의 환자수용을 요구한 것이다. 대연습으로 인한 물자의 폭주()와 열차수송의 대곤란을 견디어가며 개원 4일 후부터 수용을 시작한 것은 오로지 양 현()의 열망에 의한 것이다.

 대연습중의 수용은 곤란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환행()하신 다음, 20일경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다음달 6일에 350명의 환자수용을 완료하여 정원초과 50명에 달한 것이다(p.3-4).

 

 호시즈카() 경애원장인 하야시()가 말하는 [카고시마, 미야자키 양 현()에 걸친 특별추계대연습]에 관한 당시의 신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5단 크기로 제목으로 보도되고 있다.

 

 대원수 폐하 금일 아침 미야기()를 출발/해로()로 남 큐우슈우(), 어함() 히에이()로 출진/대연습을 통제 대원수 폐하께서는 오는 9일부터 4일간에 걸쳐 거행되는 장렬한 본년도 육군특별대연습의 통제() 14일부터 5일간의 지방 행행()을 위해 금번 6일 미야기()를 출발, 찬란한 금기()를 황조() 발상의 유서 깊은 남 큐우슈우로 전진시키고(1935117일부 {아사히()신문}).

 대원수폐하 금일 아침 성지() 휴우가()로 금기()를 발진(ۡ)/애마(ة) {백설()}를 타시고 친히 전선을 순시(육군특별대연습 제2) 10일 금기()를 카고시마로부터 천손강림(˽)의 성지인 휴우가()로 전진시키셨다. 살일우(߱) 삼주(߲)의 산천은 영광에 빛나고

 통제()를 우러러보는 양군의 정예는 사기충천하여, 최초의 충돌이 코쿠부() 평야에서 전개됨으로서 대연습은 드디어 본 무대의 막을 올리게 된 것이다(19351110일자 {아사히()신문}호외).

 

 , 193511월 남 큐우슈우에 천황 히로히토()가 육군특별대연습에 오기 때문에, 카고시마(), 미야자키() 양 현은 국립나요양소인 호시즈카() 경애원장에게 [연습지의 환자를 일소()하기 위해 연습 전의 환자수용을 요구한 것이다. 개원 4일 후부터 수용을 시작한 것은 오로지 양 현()의 열망에 의한 것이다. 다음달 6일에 350명의 환자수용을 완료하여 정원초과 50명에 달한 것이다]라고 하야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1922325일의 [벳푸(ܬݤ) 마토가하마(޳)사건]도 한원궁() 코토히토()의 벳푸(ܬݤ) 내방이 가까워오자 벳푸 마토가하마 부락의 산카마을 60여호가 벳푸 경찰서 경찰관들에 의해 불태워진 사건이다. 그 마을 거주자 중에 한센병환자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3511월 천황 히로히토가 육군특별대연습에 오는 직전에, 카고시마, 미야자키 양 현의 요청으로 호시즈카()경애원장 하야시()는 다수의 한센병자들을 동원, 수용했다. 당시의 차별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나환자 사냥]을 행한 것이다. 이것은 마토가하마 사건과 마찬가지로 황실을 위해 한센병환자가 박해를 받은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야시()가 육군특별대연습에 임하여 [나환자 사냥]을 행한 5년 뒤인 194076, 혼묘지() 부락의 환자 [일제검거]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쿠마모트현() 경찰부장실에서 협의되었다. 호시즈카()경애원장 하야시()는 동원의 직원을 그 협의에 출석시켰다. 그리고 710일에는 혼묘지 부락에서 일제검거한 사람들을 호시즈카() 경애원으로 수송할 때도 두 사람의 소원()을 파견하여 31(남자 12, 여자 9, 미감아 10)을 동원에 수용했다.

 천황 히로히토의 육군특별대연습에 관한 기사가 난 동일한 지면() [황태후폐하, 인자하심에 감사]라는 표제로 2개의 기사가 실려있다.

 

 인자하심에 감사 {은혜의 종}, 히카리가오카()에 완성일 가까워/애생원()은 기쁨으로 가득생명체로서 살아가는 행복을 잃어버린 나환자들을 위해 두터운 인자하심을 보여주신 황태후폐하의 어가(ʰ)

 ĪŪ/Ȫʪƪ//(무료할 때의/친구가 되어 위로해 주게/ 찾아보기 어려운 나를 대신해서)를 기념하여 위해 오카야마현(˪ߣ) 국립 나가시마 애생원에서는 폐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전해 줄 {은혜의 종} 건설을 계획하여, 작년부터 매월21 [봉사의 날]마다 1,200명의 수용환자가 부자유스러운 몸에도 불구하고 일제히 히카리가오카()로 출동, 무거운 도구들을 이용하여 토사()를 나르는 등 눈물겨운 노동봉사를 계속하여, 결국 이 달에 완성하기에 이르러 동원()에서는이번 달 말에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게 되어 섬 전체가 축하 분위기에 싸여 있다(1935118일부 {아사히()신문}). 

 황태후폐하의 인자하심에 감사/사립(ء) 나요양소에도 5년간 계속 하사금, 관공립에는 금일봉을 하사황태후폐하께서는 일찍이 나환자들에 대해 각별한 인자하심을 보이시어, 과거 5년간 계속해서 다액의 개인적인 돈을 전국 및 조선, 대만 등 식민지의 관공립 나요양소에 하사해 오셨는데, 황송하게도 다시 12개소의 관공립요양소에 대해서는 금일봉의 일시금을, 그리고 사립요양소에 대해서는 5년간 하사금을 내리겠다는 연락이 있어, 아카기() 내무차관, 이리에(˰) 탁무차관 및 오카야마현 나가시마 애생원장 미츠다(), 쿠사츠() 쿠류우() 낙천원장 후루미(̸ͯ)씨 등, 각 나요양소장은 11일 오전11시 오오미야 어소()를 방문, 이리에(˰) 황태후궁대부()를 통해 상기 하사금을 배수(), 퇴소했다(19351112일부 {아사히 신문}).

 

 필자가 소유하고 있는 {일본MTL}의 기관지 제58, 60, 66(193512-358월발행)을 보면 기사의 난외(ձ)에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기재되어 있다.

 [무료할 때의 친구가 되어 위로해 주게] 고마우신 모심(ٽ)에 보답하자.

 구라(ϭ)운동은 애국운동이다.

 재단법인 나예방협회편 {1936년도 나환자의 지도()}(19373)에는 각 부현(ݤ)의 나환자 지도상황이 [부현지사(ݤ) 보고]로서 기재되어 있다. 그 중에서 히로시마현()과 나라현(ү)의 상황의 일부를 소개한다.

 

(히로시마현) 3. 레코드에 의한 선전 나예방협회로부터 송부()받은 황태후궁의 어가(ʰ) 및 아다치(ӹ)씨의 나예방에 관한 강연 레코드를 625일부터 히로시마(), 쿠레(), 오미치(ڭԳ) 3개 시내의 활동사진관 19개소에서 막간을 이용하여 일반에게 널리 청강토록 하였다.

(나라현) 5. 황태후폐하의 어가(ʰ)녹음 레코드 선전 귀회()로부터 송부 받은 황태후폐하 어가(ʰ)녹음 레코드를 각 경찰서장에게 회송()하여, 본 기간 중 활동사진관의 막간을 이용하여 일반에게 청취토록 하여 본병(ܻ)예방에 노력하였다(p.45).

 

 19416월에 나예방협회(후생성 위생과내)가 작성한 {입원안내}라는 소책자가 있다. 이 소책자의 첫머리에도 [황태후폐하의 인자하심]이 적혀 있다.

 [황송하게도 황태후폐하께서는 일찍이 불행한 나환자들에게 두터운 연민의 정을 보이시어 일상의 생활용품을 절약하여 재삼(߲) 다액의 내탕금 및 고마운 물품들을 나예방사업을 위해 하사했을 뿐만 아니라 환자 및 직원까지도 위로하시고, 그 뒤에도 끊임없이 본 사업을 장려해 주셨다는 것은 비할 데 없는 감격이며, 그로 인해 자칫하면 잊어버리기 쉬운 이 사업도 지금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3211월 폐하에게는 오오미야 어소()의 가회(ʰ) [나환자를 위로하여]를 출제()하시고, 친히

  무료할 때의 친구가 되어 위로해 주게 찾아보기 어려운 나를 대신해서

라는 고마우신 어가(ʰ)를 내리시어 당국 및 요양소 직원들을 격려하셨습니다.

 우리들 일본국민은 이러한 마음을 잘 받들어 모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얼마 전 모리(ߵ)씨로부터 저서인 {차별로서의 나()}(쿄오토 법정출판, 1993)을 증정 받았다. 그 속의 논고인 [국가고(ʫ)]의 일절을 읽고, 현재의 필자의 마음을 대신 써 주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국가고]의 초출() {카에데()}(오쿠() 광명원의 기관지) 19572월호이다. 모리(ߵ)씨의 40여년 전의 논고()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이들 [불량 부랑(ݩ)나환자]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경찰력(국가권력)이 필요했다. 그 당시, 즉위의 대전()이라든가 황실의 인자하심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이 나()대책의 빈곤함을 호도()하기 위해서는 필요했던 것이다.

 정명(٥)황후, [신성하여 침범할 수 없는] 천황은 권력의 방패로서는 가장 효과적이었다. 사건의 시비선악을 막론하고, 설령 인권이 유린되더라도, 생명에 관계되는 일이더라도, 그 이름 아래서 행해진 것에 대해서는 항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편 그 당시는 요양소의 암흑시대라는 시절이기도 했다. 따라서 비참한 현실생활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도 환자들의 관심을 한 점에 모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 한 점이 바로 정명황후, 즉 천황제()였다. 환자들은 그것에 감격하고 있었던 것이다(p.42).

 

 다음에 조선인 한센병환자에게 있어 [황실의 인자하심]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2

 일제통치하의 식민지조선에 있어서, 한센병환자에 대한 [황태후 인자하심]을 소록도갱생원장 스호오()를 비롯한 당시의 [()]정책 추진자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었을까? 또 조선인 한센병환자에 있어 [황실의 인자하심]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9301110, 황태후는 식민지를 포함하는 전국의 각 나요양소에 대해 하사금을 내렸다. 소록도자혜의원의 경우를 살펴보면 [황태후 폐하의 뜻에 따라 내선(Ү) 각 요양소에 대해 환자위안을 위한 내탕금의 하사가 있었다. 본원의 하사금 2,500원은 원장이 오오미야 어소()를 참내(Ү)하여 이를 배수(), 1119일 전라남도 지사대리, 경찰부장 츠치야(), 위생과장, 직원 일동이 열석한 가운데 엄숙한 전달식을 거행했다]({1931년 소록도자혜의원 연보} 조선총독부 p.19)라고 되어있다.

 당시의 소록도 자혜의원 원장은 야자와()였다. [오오미야 어소()를 참내(Ү)]한 야자와 원장은 황태후로부터 하사금 2, 500원과 동시에 직원의 은사()금품]으로서 원장에게는 [() 화병 1개와 금일봉], [순시() 박생두(), 금일봉]이 주어졌다.

 황태후의 하사금 2,500원의 용도는 다음과 같다.

 [과자(환자일동에게 배포), 소형활동사진기, 악기, 운동구, 레코드, 서적, 홈라이트, 벚나무 기념식수, 선행자 표창, 가구, 기타]( {연보} p.19). 

 다음해인 19311110일 오전 10시에는 [황태후폐하의 하사금 기념식을 개최]하여, 소록도자혜의원은 환자일동에게 타올과 과자를 급여했다.

 

 193331, 황태후는 이리에(˰) 황태후궁대부()를 통하여 발족한 직후의 조선나예방협회에 대하여 [하사금]을 매년 10,000원씩 3년간 하사할 것을 전달했다. 앞서 소개한 세키야(μ߲) {황태후 폐하의 인자하심과 나예방사업}(1934) 속에서, [조선의 나예방협회]라는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예방협회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내지(Ү)에는 그런 것이 설립되었으며 또 조선에서도 역시 그 뜻에 따라서 나예방협회가 설립된 것입니다. 이는 실로 유쾌한 이야기로 아마 작년인가 재작년, 내지의 예방협회보다는 훨씬 늦습니다만 처음에는 5,60만원정도 모금하려는 계획이었으나 금방 2배인 120-30만원의 모금이 조선에서 모인 것입니다. 그것도 돈을 낸 사람들이 대부분 조선인 제군들로써, 이렇게 고마운 일이 어디 있느냐고 기꺼이 다액의 돈들을 내게 되어 예상 이상의 성적을 올린 것입니다(p.3).

 

 그러나 [조선 나예방협회의 설립]항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하사금]이 조선 나예방협회 설립의 계기가 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세키야(μ)가 말하듯이 [대부분 조선인 제군들로써, 이렇게 고마운 일이 어디 있느냐고 기꺼이]라는 사실은 없었다.

 소록도갱생원 발행 {연보}의 각 연도판을 살펴보면, 그때까지 언급되지 않았던 황태후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 것은 1938년 이후이다. 그것도 그 이후에는 매년 {연보}의 첫머리에 [황실의 인자하심]이라 하여 황태후 사다코() [()에 관한 사적()]를 게재하기 시작한다. 사실은 1938년은 [517일 황송하게도 황태후 폐하께서 관공립 나요양소 소장회의에 출석 중이던 당 원장에게 특별히 단독 배알을 허락하시어원장 스호오()는 같은 날 오오미야 어소()를 방문하여 1시간 10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단독 배알하고, 당원()의 현황 및 조선 내의 나환자에 관한 보고를 드리자 심히 환자들의 신상에 대해 진념(ҷ)하신]({1938년 연보} p.13) 해이다.

 {1938년 연보}에는 첫머리의 화보에 [황태후폐하의 하사품]의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나무상자가 2개와 야채의 사진으로, 나무상자의 속에는 스호오()가 황태후로부터 받은 [계란과 메추라기일, 그리고 과자]가 보인다. 그리고 동 {연보}에는 다음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황실의 인자하심  1935118일 황송하게도 황태후 폐하께서는 전국 관공립 나요양소장에 대해 오오미야 어소()에서의 배알을 허락한다는 취지의 소식이 있어 원장 스호오()는 오오미야를 방문하여 당원() 사업의 개요를 진언하고 갖가지 물으심에 답하여, 더욱이 동년 1110일 황송하게도 황태후 폐하의 뜻에 따라 제반설비 등의 비용으로 내탕금 5,000원을 하사한다는 연락이 있어환자들은 모두 깊은 성은()에 감읍하였다.

 그리고 1938517일에는 황송하게도 황태후 폐하께서 관공립 나요양소장 회의에 출석 중인 당 원장에게 특별히 단독 배알을 허락한다는 고마우신 말씀이 있어, 원장 스호오()는 동일() 오오미야 어소()를 방문하여 1시간 10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단독 배알하고, 당원()의 현황 및 조선 내의 나환자에 관한 보고를 드리자 심히 환자들의 신상에 대해 진념(ҷ)하시어퇴소할 때에 어소()와 신쥬쿠 어원()내에서 재배한 각종 야채 한 바구니, 계란, 메추리알 및 과자를 하사하시는 등, 항상 구라사상(ϭ߾)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영광을 입어 황실의 인자하심에 깊게 감격하고 있다(p.1-2).

 

 소록도갱생원 {1939년 연보}의 첫머리 화보의 첫 사진은 [준공한 황태후궁 어가비(ʰ)]이다. 거기에는 [황태후폐하 어가(ʰ) [ĪŪ/Ȫʪƪ//, 황태후궁 대부(), 오오타니 마사오() 각하 서()]라는 기재()  보인다.

 동 연보에는 동년 921 [현 원장 스호오() 칙임()으로 승서()]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조선총독부관보} 3832(19391027) [서임() 및 사령(ֵ)]에 의하면, 스호오()는 동년 1021일부로 [승서() 고등관 2]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칙임관은 칙명에 의해 임명하는 것으로 관기(ί)에는 옥새()를 누르고 내각총리대신이 연월일을 기입하여 이를 봉()하는 것으로, [고등관 2등의 관명]의 예로는 [내각 및 각성()의 국장, 각성의 외국부장(ݻ), 각성의 참여관(ί), 육해군 소장()]을 들고 있다. 아이치() 의전()을 졸업한 총독부의 일개 기관(ί)에게 불과하던 스호오()로서는, 소록도갱생원장이 되어 나환자 6,000명수용의 확장공사를 완성시키고, 구라(ϭ)의 공에 의해 황태후의 눈에 들어, 황태후와의 장시간에 걸친 단독배알을 하는 등, 자신이 파격적인 출세를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1939년 연보}의 권두의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다.

 

 황태후폐하 어가비(ʰ)의 건설 : 황태후폐하의 나()에 관한 수많은 인자하심에 대해서는 직원을 비롯한 환자일동은 단지 감격하고 황송할 뿐으로, 특히 앞서 내려주신 [ĪŪ]의 어가(ʰ)를 배송()하고는 그 따뜻한 마음이 가슴을 저며 감격의 눈물을 금할 수 없는 심정으로, 원내의 적지()에 이 어가비(ʰ)를 건설하여 아침저녁으로 이를 배송함으로서높은 덕을 그릴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로 인해 항상 그 마음을 명심하고 일치단결하여 각자의 임무를 다함으로서 홍은()에 보답하기 위해 그 건설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우연히 1938625일 황태후폐하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환자일동의 영세한 헌금에 의해 상당한 자재를 구입함과 동시에, 이래로 비석을 물색 중에 있던 중 다행히도 도내(Ү) 병사지대의 삼림 속에서 적당한 석재를 발견하였는데 추정중량이 4,000관으로 직원들과 함께 운반에 착수한즉, 중증, 부자유자를 제외한 전 환자가 출동, 일치협력하여 이에 임함으로서 예상 밖의 진척을 보여 불과 수일만에 건설예정지인 중앙공회당 앞으로 반입을 완료했으니, 이 운반은 비석건설 전() 공정 가운데 가장 난사()였던 바, 오로지 직원들의 적절한 지도와 환자들의 적성()에 의한 단결력에 의한 것이었다.

 어가(ʰ)의 휘호는 미리 오오타니() 황태후궁 태부에 의뢰해 둔 것으로 193910월 하순 전() 공정을 완료하여 1125일성대한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비석 높이 13, 7, 두께 2(p.1)].

 

 그 다음해의 소록도갱생원 {1940년 연보}의 화보() 첫머리에는 [황태후 폐하가 하사하신 단풍] [황태후 폐하가 하사한 단풍나무를 묘포에 가식(ʣ)](1940513)이라는 제목의 2장의 사진이 실려있다. 그 다음 쪽에 실려있는 [스호오()원장 동상제막식](동년 820)의 사진 3장에 관해서는 후술한다. 본문 첫머리의 황태후에 관한 기술()부터 소개하기로 하자.

 

 하사금 : 19401111, 기원(Ѻ) 2,600년을 축하하는 가절(ʢ)을 맞이하여 황송하게도 황태후 폐하께서는 구라사업 조성의 뜻을 품으시고 전국 17개소의 관공사립 나요양소에 대해 다액의 금액을 하사하신다는 소식에 접하여 당원()도 그 혜택을 입고져그 하사금으로 병동지대의 적지() [수도관(Գν)](벽돌도 단층, 건평 50)을 건설하여 환자로 하여금 영구히 폐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게 함으로서 그 뜻을 받들도록 계획하던 중, 설계를 비롯하여 자재의 입수 기타 제반의 준비를 완료하여 불일() 시공하게 되었다. (두 번에 걸쳐)다액의 하사금을 받게 되어 이번에도 역시 그 고마우심에 황송, 감격하지 않을 수 없으며, 환자일동 이 심후()한 혜택을 입음에 황국()에서의 생을 향수()할 수 있는 고마움에 오로지 감읍()할 따름이다.

 황태후폐하가 하사하신 단풍 : 1940510일부터 후생성에서 개최된 전국 관공립나요양소장 회의에 출석 중인 스호오()원장에 대해, 513일 오오미야 어소()로부터 부름이 있어 당일 원장은 어소()를 방문했다. 오오타니() 황태후궁태부께서 원장을 불러 [금번에 황송하게도 황태후폐하께서 나요양소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는 병자들의 신상을 불쌍히 여기시는 깊은 심정에서 단풍나무 실생()을 소록도갱생원에 하사하셨다]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단풍나무 실생묘목 3바구니 150포기와 과자 2상자를 하사 받고 원장은 황송한 마음으로 어소()를 퇴소환자 위안장(공원)의 적지에 각각 정식()을 완료했는데, 이 하사하신 단풍은 소헌()황태후의 인장()인 신엽()에 연유하는 것으로, 성장한 다음, 여름에는 푸른 잎 그늘에서 휴식하고 가을에는 단풍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소헌황태후의 기리도록 하려는 깊은 생각에 의한 것으로(p.1-2).

 

 {1941년 연보}의 첫머리는 황태후의 [어사진봉안고(ͷ)] [하사금으로 건립한 수도관(Գν)]의 사진으로 시작된다. 본문은 [황태후폐하의 사진()하사]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1941715일 후생성에서 관립 나요양소 소장회의 개최시 각 나요양소에 대해 황태후폐하의 사진을 하사한다는 취지를 들은 스호오() 원장은, 요시자키() 사무관, 닛타()약제관, 오오사카() 의관 등을 대동하여 79일 소록도를 출발했다. 이리하여 716일 오오미야 어소()로 각 요양소장과 함께 방문하여 사진을 배수()하고 공축감격(̭)하여 퇴소. 사진을 봉지()하고 귀도(Բ)에 오른 스호오()원장은 719일 갱생원 부두에 도착. 이날 당원() 전직원, 소록도초등학교 학생, 소록도형무소 출장소직원, 애국부인회원 등이 거도()적으로 봉영()하고 사진은 즉시 사무본관 회의실의 봉안전()에 봉안하고 봉재식()을 거행하여 동 515분 지체없이 식을 종료한 뒤, 사진을 미리 설비한 봉안고(ͷ)에 무사히 봉안했다(중략).

 황태후폐하의 사진 하사 소식은 전례가 없는 일로 이렇게도 나환자의 신상에 깊은 진념(ҷ)을 보여주신 것은 황송하기 그지없는 일이며, 이를 직업으로 하는 300여 직원의 감격은 물론, 입원환자 6,000명은 이 고마우신 마음에 오로지 감읍()하고, 은혜에 대해 충심으로 감격의 정을 나타냄과 동시에 더더욱 황국신민으로서의 자각을 깊이하여 적성()으로서 이에 보답하고자 한다(p.1). 

 

 이상 기술한 바와 같이, 식민지를 포함한 일본의 [()사업]전반에 대하여 황태후 사다코(, 황실)는 관여하고 있었으며, 미츠다()와 스호오()를 비롯한 당시의 한센병정책 추진자들은 [황실의 인자하심]을 내외에 어필하면서 황태후의 권위를 방패로 하여 입소자들의 전면적 격리·관리통제를 강행한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어용신문] {매일신보} {경성일보}도 종종 [황실의 인자하심]을 보도했다. 19401113일의 {매일 신보} [황태후폐하의 인자하심, 나예방협회에 하사금]이라고 보도했으며, 또한 {경성일보}19421111일에 [황송하게도 황태후폐하, 나요양소(조선 2개소)에 하사금]이라는 표제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동경전화황송하게도 황태후폐하께서는 항상 나구제사업에 깊이 마음을 쓰시어, 매년 고마운 소식을 듣고 있으나, 10일 코이즈미() 후생상을 비롯한 카미야마(ߣ) 부생병원(시즈오카)미노부() 심경()병원(야마나시), 도로원()(쿠마모토), 조선의 대구 애락원, 여수 애양원 및 대만(ؽ)의 낙생원의 각 사설요양단체에 대해 금년도도 계속 자금을 하사한다는 연락이 있어 후생대신대리 나다오(ڭ) 위생국장, 타케나카() 내무성 관리국장이 10일 오전11시 오오미야 어소()를 방문, 감사히 하사금을 수수()하여 퇴소했다. 내무성에서는 이사카() 조선총독부 출장소장, 시마다() 대만총독부 출장소장에게 각각 전달했다.

 

 14회 일본나학회 총회는 194094일부터 3일간 소록도갱생원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회장으로 개최되었다. 이 해의 일본나학회장은 스호오()였다. 소록도에서 총회(1)가 있었던 2주일 전인 동년 820, 스호오 마사스에()의 동상제막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동상의 모습을 소록도갱생원 {1940년 연보}를 통해서 살펴보자.

 동상() [병사지대 중앙운동장의 동쪽 구릉 중심지]에 세워져, 그 부근 일대에는 [황태후 폐하로부터 하사 받은 단풍을 식재하여 그 인자하심을 기리도록 하였으며220여일이 지난 818일에 준공]되었다. [동상의 총 높이는 3165(9.5m), 기초 3, 대석() 1755, 동상 11, 동상의 중량은 약700관으로 대석()은 오카야마현산(˪ߣߧ) 어영석과 효고현산(ܲͷߧ) 황룡석을 사용하여 총공사비 12,000, 석공 219, 비계공 16, 재원환자 출역 3,800명을 요()]했다. 동상의 제자()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휘호했으며 동상설계에 부수된 주변일대의 공사는 쿄오토(Դ) 야마시나(ߣΡ)의 일등원()관계자들이 담당했다. 총 공사비 12,000원 중 약 9,000원은 6,000명의 조선인환자로부터 거출했다.

 [결혼을 하려는 경우 우선 부락대표에게 신청한다. 대표와 대표들의 회합이 끝나면 병사주임에게 신청한다. 주임은 원장에게 신청허가를 부탁한다. 좋다는 허가가 내리면 신사()에 참배하여 혼약을 선서하고 원장의 동상 앞에서 감사의 보고를 했다고 한다. 물론 이럴 경우 본인들의 신청에 의해 단종을 행했다]. 소록도갱생원의 부부동거자는 850-60쌍이었다고 한다({문화조선} 4권 제3, 19425, p.51). 스호오()의 동상은 이처럼 수용환자의 관리, 통제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14회 일본나학회 총회는 후생성 예방국, 조선총독부 경무국, 각관공립 나요양소 등의 간부 다수가 모여 개최되었다. 오오미야 어소()로부터 특별히 본 총회를 기회로 황태후의 시의()인 니시카와(۰)가 총회 및 소록도갱생원의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내도()했다. 그 때의 소록도 시찰보고는 후에 니시카와() {조선 소록도갱생원을 통해 본 조선의 구라사업}라는 제목으로 상당히 상세한 내용의 책자로 남아 있다. [황실의 인자함]을 소록도갱생원에 수용된 환자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소개하기로 하자.

 

 나는 스호오()원장, 기타 직원들에게 안내되어 시가(̾)박사와 함께 운동장 위의 나지막한 평화의 정원에 들어섰다. 뒤로는 환자전체의 기부로 완성된 스호오()원장의 동상의 웅자()도 운동장을 향해서 서 있다. 운동장에는, 흰옷을 입은 환자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왼쪽이 남자, 오른쪽이 여자이다. 물으니 4,500명이라 한다. 중증환자와 간호와 사무에 필요한 자들을 제외한 모든 환자들이 집합한 것이다. 우선 궁성요배()를 한 다음, 나더러 뭔가 훈시를 하라는 부탁이다. 나는 조용히 환자들을 향했다. 통역은 원래의 이름을 오순재(), 현재의 이름은 고토오()씨이다. 오씨는 간호장으로 농업지도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여러분. 황국신민으로서 우리 서로가 여기서 만나게 된 것은 본인으로서는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중략) 원래 행복이건 불행이건 요컨대 그것은 자신의 마음 속, 자신의 마음 깊은 밑바닥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황국신민으로서의 행복이 마음속으로부터 용솟음쳐 나오도록 더욱 정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진보한 황국일본의 의학()의 혜택을 유감없이 받을 수가 있다. 이러한 행복이 세계 어느 나라의 나환자들에게 있겠습니까?

 더욱이 황송한 것은 황태후폐하로부터 감사하고도 인자하신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황송하게도 수차에 걸쳐서입니다. 그 어가(ʰ)를 살펴보면,

 [자신이 가서 직접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그렇게 찾아가기에는 사정이 허락지 않는 자신이다. 부디 이러한 자신을 대신하여 평상시의 친구가 되어 불행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라]는 진심에 가득 찬 마음씨가 황송할 뿐입니다. 이 황국 이외에, 세계의 어느 곳에서 언제, 감격의 고마운 눈물을 참을 수 없는 이러한 행복을 맞본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부디 황국신민으로서 보다 건강하고 보다 밝은 생활을 계속하시길 열성을 다하여 기원합니다](p.22-23). 

 

 14회 일본 나학회총회가 소록도에서 개최된 9개월 뒤인 19416, 간호장 사토오(߲)에 영합하여 원장 스호오()의 동상건립을 제안하고 실행한 환자대표(고문) 박순주()가 환자 이길용(ף)에게 찔려 죽었다(이길용은 형무소 내에서 자살).

 그리고 이 사건이 있은 1년 뒤인 1942620, [월례 보은감사행사]가 스호오()원장의 동상 앞 운동장에서 행해지고 있을 때, 같은 장소에서 환자 이춘상()에 의해 원장 스호오()가 살해된다.

 동년(Ҵ) 625일부 {토오쿄() 아사히()신문} [경성전화스호오() 소록도갱생원장의 뜻하지 않은 순직에 대해 황송하게도 황태후폐하께서는 동 원장의 생전의 구라(ϭ)사업에 대한 공적을 어여삐 여기시어 특별히 장례비를 하사하신다는 말씀이 있었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환자 이길용이나 이춘상이 뽑아든 칼은, 사실은 [황실(황태후)의 인자하심]을 향한 것이나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황태후 사다코()는 일본의 패전 직후인 1951517일 협심증으로 사망했다.

 

 사다코()의 사후, 19526월에 [나예방협회]는 해산되고 새롭게 [재단법인 등풍()협회]가 설립되어 타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사다코의 셋째아들)가 총재에 취임했다. [()]은 사다코의 인장()이며 [()]은 사다코의 시어머니인 하루코(ڸ)의 인장이다.

 등풍()협회는 매년 {등풍소식}(이사장·오오타니())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고 있으나 [()예방법] 개정문제를 특집한 [1995년도]판을 보면, 첫머리에 사다코의 사신을 게재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 있다.

 [타카마츠노미야() 한센병 자료관이 개관한지 벌써 2. 불어나기 시작한 젊은 견학자들은 차별과 편견에 허덕이던 고난의 역사를 처음 알았다고 하면서, 환자들에 대한 황실의 깊은 인자함에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p.2).

 일본에서는 한센병자료관을 견학한 [젊은 견학자들이, 환자들에 대한 황실의 깊은 인자함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지금도 소록도병원에 있는 한국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도대체 무엇이라고 말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