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의 인자함]의 의미하는 것


4 소록도갱생원 입원자들의 생활과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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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127일 소록도갱생원장 스호오()는 정무총감 오오노()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낸다

 

 근하() 연말을 맞이하여 의회()의 일로 다망()하실 것으로 사료되나, 변절기에 부디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과거 7년 간의 공사도 무사히 끝나 세계 제일의 요양소가 완성되어 조선 내의 환자들도 20년 후면 해결될 것으로 판단되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는 오로지 각하의 배려의 덕택으로, 전 조선()으로서 그리고 당사자인 우리들로서 감사말씀 드리는 바입니다.   환자들은 국장() 파견 하에 성대하고 무사히 종료하였으며? 이 점 또한 감사 드립니다. 난필서중(կ)으로 인사말씀 올립니다. 총총.

 

 1941520, 소록도갱생원 창립25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식이 거행되어 오오노() 정무총감을 비롯한 기타 다수의 내빈이 출석했다. 원장 스호오() [식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3212, 재단법인 조선나예방협회가 설립되어 소록도 전도를 매수하고 다음해인 1933년 대확장 공사를 시작한 이래 6, 지난 193910월에 예정된 전 공사를 완료함으로서 수용정원은 일약 5,770명으로 불어나 현재 수용총수는 6,000명의 다수에 이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내용, 외관 공히 충실할 뿐 아니라 원내의 공기도 일신()되어 참으로 이상적 낙원을 형성하게 되었다(방선은 필자).

 

 스호오()원장의 말처럼 소록도갱생원이 과연 [세계 제일의 요양소]이며 [원내의 공기가 일신되어 참으로 이상적인 낙원]이었던 것일까? 소록도에 격리·수용된 한센병환자의 생활과 노동의 실정을 살펴가면서 명확히 짚어보기로  하자

 

 소록도갱생원 {1941년 연보} [환자의 상황]등에 쓰여진 기술(p.35 이하)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병실 및 일상의 생활상황]을 살펴보면, 병사(ܻ)의 경우 경증환자를 수용하는 보통병사와, 중증·부자유 환자를 수용하는 중증병사의 둘로 분리되어 있다. 스호오()원장에 의한 대확장공사 이전의 보통병사는 11()5명을 수용하고 있었지만, 1934년도 이후 신축된 보통병사는 14실에 40명의 수용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지세() 관계상 1220명 수용의 병사도 있었다. 그리고 [부부동거환자]를 위해 1612명 수용의 병동도 건축되었다. 니시카와(۰) {조선소록도갱생원을 통해 본 조선의 구라사업}에 의하면 [부부동거. 이는 19364월부터 실시되고 있으며 1939년말 현재 836쌍이다. 미리 본인의 신고에 의해 단종술(정계수술)을 실시한 후에 동거시키는 것이다]라고 쓰여있다(p.9).

 {연보} [중증 전부 및 부자유환자의 대부분은 이를 중앙병사에 수용하고 중증에 대해서는 한사람에 대해 한사람의 경증환자를, 또 부자유실에는 맹인 혹은 사지불구 등 자유롭지 못한 자들을 수용하여 환자 2명 내지 3명에 대해 경증환자 한사람을 부첨(ݾ)하도록 하여 일상()을 간호, 처리토록 하고 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앞에 소개한 니시카와()의 글에 의하면 1940년 당시 [전맹()]380명이었다고 되어있다. 방 하나에 10명 이상의 환자를 수용하고, 거기다 중증환자나 부자유 환자의 일상적인 간호, 부첨을 경증환자에게 시킨 것은 문제이다. 당시 수용된 환자수 6,000명에 대해 직원수는 터무니없이 적어서 1941년의 경우를 살펴보면 불과 279명에 불과하다. 내역은 의관(ί)과 의원이 11, 약제관·약제수 6, 간호원·간호인 131(일본인 59, 조선인 72)등으로 되어있다. 원장 스호오()가 소록도갱생원을 [세계 제일의 요양소], [이상적인 낙원]이라고 아무리 호언()하더라도, 의료내용이 따르지 않는 요양소는 단순한 강제수용소에 불과하다.

 니시카와의 전게서(̩) [조선의 갱생원 개원 이래의 사망환자 1,034명의 사인(1939년 조사)을 살펴보면 (1)결핵이 제1위를 차지하여 267명스호오() 원장의 이야기로는 결핵사(̿)80%이다. 그리고 나환자는 일반적으로 폐렴에 약하다. 독감이라도 유행하면 퍽퍽 쓰러진다고 한다. 이와 같이 결핵 사망자가 많다는 것은 집단생활의 밀도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낡은 요양원일수록 결핵사가 많은 것 같다](p.6)라고 말하고 있다. 니시카와는 황태후 사다코의 시의()이자 의학박사이다.

 

 하나이 젠키치() 2대 원장의 시대부터 한사람의 하루 주식() 정량은, 환자의 경우 남자가 백미3홉과 보리·조를 합쳐 3(합계 6), 여자가 백미 2홉 반과 보리·조를 합쳐 2홉 반(합계 5)으로 정해져 있었다. 음식물은 환자의 물질적 위안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원() 당국에 아부하는 환자대표 박순주() 등의 제창에 의해 1938년의 [기원절(211)]부터는 환자 한사람 당 하루 반 홉을 감량했다. 그 때문에 원당국은 1년에 2만원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나요양소의 1인당 하루 식비, 이것은 1940년 현재 내지(Ү)의 경우 국립요양소에서는 26, 부현립요양소()에서는 225(1935년은 195)였지만, 조선의 이 갱생원에서는 이전()에는 157, 1938년에는 179, 1939년에는 219리였던 것이다](p.12, 니시카와 {전게서}).

 

 {연보}에 기술되어 있는 소록도갱생원의 건물 일람을 보면, 정신병사 및 감금실 51.91(171), 부속벽돌담 77.97(275), 여자감방 13.78, 남자감방 68.91(273)으로 되어 있다.

 더욱이 니시카와의 {전게서}를 보면 소록도에 있는 건물로서 [형무소]에 관한 기록이 있다.

 

 치형() 및 구라(ϭ)를 목적으로 하는 특별한 형무소가 원내에 설립되어 있다(중략).

 벽돌조의 청사() 외에 399(1,317)의 건평으로, 현재의 감방수는 12, 남자는 감방잡거 7, 독거(Լ) 3명이며, 여자는 감방잡거 1, 독거 1명이다. 1935년에 개청()되고 나서 194091일까지의 수감자수는 238명으로 그 중 형기(Ѣ)를 만료하고 출소한 자가 204명이니까 현재는 34명이 있다. 간수()는 남자10, 여자 1명이다.

 2,000평의 전경지()에서 일하거나, 짚신이나 그물을 짜는 등의 작업을 시켜 무료함을 달래주고 있다. (중략) 석방된 자는 전부 소록도갱생원에 수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는 상당히 불량한 도배()도 있으나 다른 보통환자들과 구별 없이 항상 강력한 지도를 가하여 그 개과천선을 촉진, 요양에 노력토록 하고 있다(p.25-26).

 

 계속해서 소록도에 수용된 한센병환자의 노동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토목공사

 1기 확장공사에 있어서는 [직원지대]의 토목공사는 보통 인부를 사용했지만 [환자지대]는 주로 환자들의 노동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경증병사, 각종 부속건물, 공회당, 형무소, 운동장 등의 부지공사 전부와 도로 및 매립공사의 대부분은 환자들의 손에 의해 행해졌다. 또한 환자지대에서의 벽돌, 목재, 밤자갈, 자갈, 모래 등 건축재료의 양육() 또는 운반, 기초 콘크리트 공사, 각 병동의 온돌놓기 등도 대부분이 환자들의 취역이었으며, 또한 벽돌제조에도 출역하여 그 출역 총연인원수는 98천여명에 달했다. 취역한 환자에 대해서는 근소인 작업수당이 지급되었다({조선 나예방협회 사업개요} 193510).

 2, 3기 공사로서는 종루(ק)(19369), 납골당(19379), 등대(동년 10), 병사지대 부두공사(193910), 황태후 어가비(동년 3)의 건설이 환자작업으로 행해졌다.

 

 {1941년 연보}에 의하면 [이번 사변(중일전면전쟁-필자)의 진전에 따라 각 방면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 물자의 공급이 매우 곤란해져 당원() 내의 수요물자의 입수에도 큰 지장을 미치게 되어, 환자들의 작업에 의해 원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물자는 자급자족을 꾀하고, 더 나아가 원외의 수요에도 응하도록 하여 목탄 제조, 비료용 가마니 짜기, 벽돌 제조, 조제() 송지()의 채취, 토끼 모피의 생산 등을 하고 있으나 이 모두가 지방으로부터의 수요가 왕성하여 상당한 다량을 공급하고 있다](p.39-40)라고 되어있다. 이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2) 제탄() 사업

 소록도갱생원에서는 매년 상당한 다량의 목탄을 구입하고 있었으나, 1940년경이 되면 목탄의 입수가 매우 곤란해졌기 때문에 조선나예방협회의 사업으로서 수용환자의 작업에 의한 목탄의 자급자족을 꾀한다. 동시에 원외의 수요에도 응하도록 하여 전라남도 산림과에서 파견된 기술원의 지도에 따라 탄소() 가마 6기를 축조하여 부근 도서()지대의 삼림으로부터 입수한 탄재()1940119일부터 시험적으로 제탄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성적이 대단히 양호해서 원외로부터의 수요도 왕성했기 때문에 1940년도에는 다시 탄소()가마 2기를 증축하여, 장래는 30기까지 증축할 계획이었으며, 연간 약 3만섬을 생산하여 그 대부분을 지방에 공급하도록 계획 중이었다고 한다(1940 {연보} p.9).

 그리고 제5대 소록도갱생원장 니시키()가 나가시마() 애생원장 미츠다()에게 보낸 편지가 {애생} 19444월호에 실려있다. 전쟁말기의 소록도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지만 그에 의하면 [()가마니 제조 약2만장 생산예정(지방의 수요), 목탄제조는 주로 자가용, 수량미정, 송지() 채취 1933년도 약 2백관]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1940년 연보} [수용환자/생산작업](p.8-10)의 기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3) 가마니 제조

 종래 수용환자의 작업에 대하여는 이를 장려하는 의미에서 근소()하지만 작업임금을 지급(일당 2전∼5)했으며 환자는 이를 저축하여 용돈으로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급여는 주로 경증환자로 노동이 가능한 환자에게 편재()되므로, 일부 부자유자(장애자)에 대하여는 양토()를 장려하여 그 결함을 보충하여 왔으나, 최근 시국의 영향에 따라 가마니의 수요가 격증한 것을 기회로 가마니 짜기를 주로 하여, 부자유 환자들에게 이를 행하게 함으로서작업임금관계의 결함을 보충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당국의 장려생산품의 충족의 일단이 되 도록 계획하여 전라남도 당국과 타합한 결과, 시국적()으로 훌륭한 발상이라는 찬의()를 얻었기 때문에 1941년 중에 당장 비료용 가마니 30만장을 제조하도록 기술원을 초빙하여 재원자를 지도했다.

 가마니 짜기는 주로 외부작업을 할 수 없는 부자유자 및 여성환자에게 종사시켰다. 이미 가마니틀 5백대의 준비가 끝나 재료인 짚의 입수도 대체로 순조롭게 진척되었기 때문에 19412월부터 본격적으로 제조에 착수하여 전술()한 목표수량을 짜기 위해 노력 중이다.

 

 (4) 송지()의 채취

 송지()는 군수() 기타의 자재로서 상당히 용도가 많으며, 특히 중일전쟁이래 그 수요가 특히 현저하여 송지의 채취는 국책적으로 장려되고 있다. 소록도갱생원의 병동지대에는 채취에 알맞는 수령의 소나무가 무성한 광범위한 산림이 있어, 1939년 이래로 송지를 채취해 왔다. 해마다 약 6,000킬로그램의 조제() 송지를 생산하여 이를 전라남도 산림회를 통해 수요회사에 공급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실시할 예정이다.

 

 (5) 토끼 모피의 생산

 소록도갱생원의 수용환자가 식용() 및 일상적인 위안을 위해 사육하고 있는 집토끼는 수천마리를 헤아리나, 이 집토끼를 도살함에 있어 모피(پ)는 전혀 고려되지 않아 탈모한 다음 가죽과 고기는 모두 식용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나, 중일전쟁(1937)이래 토끼의 모피는 군수품으로서 상당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여 다량의 수요가 있음을 고려하여 [도살할 때마다](1940 {연보}) 완전히 박피()한 뒤에 규격에 적합한 제법()에 따라 소독, 저장하여 해마다 약 1,500장을 당국에 공출하게 되었다. {애생} 19444월호의 니시키()원장의 [소록도갱생원 근황]에 의하면, 양토() [사육수가 5,000두 이상이며 그 중 3,000두분의 모피는 군수()로 공출, 고기는 환자식용]이라고 되어있다

 

(6)벽돌의 제조

  1933년이래 6개년에 걸친 소록도갱생원의 확장공사에 있어 건물은 전부 벽돌조로 계획했기 때문에 막대한 벽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변에 그 생산지가 없고 이를 원격지에서 구입하게 될 경우 많은 일수()와 다액의 수송비가 필요하며, 한편 건축공사는 급증하는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급속한 진척을 필요로 했다. 그런 이유로 원내에 공장을 설치하여 벽돌의 자급자족을 꾀하기로 하고 토질을 조사한 결과, 풍부한 원료토()가 있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기술자를 초빙하여 벽돌가마를 축조, 193312월부터 벽돌제조를 시작했다.

 이것이 원내에서의 벽돌제조의 시작이다. 이래, 1939연말까지 만(ػ) 6년간에 건설된 환자 6,000명의 수용병사를 비롯하여, 사무·치료 양 본관, 각종 창고, 직원 300명의 관사, 기타 모든 건축물에는 전부 원내에서 생산한 벽돌이 사용되었다. 벽돌제조의 취로()는 경증환자들이 담당했다. 확장공사 후반 이후는 기술직원의 감독 하에 거의 환자들이 제작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도내(Ү) 거의 전 지역에 걸친 수많은 건물들은 환자가 제조한 벽돌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 원내에서 생산된 벽돌은 남부 조선지방 각지로부터 빈번한 수요가 있었으며, 특히 대륙침략전쟁의 영향에 의한 물자결핍의 심각화와 함께 수요가 특히 격증했기 때문에 1940년 현재의 연간 140만장의 제조능력으로도 도저히 공급이 곤란한 상태에 있었다고 {1940년 연보}는 보도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내의 동아여행사 조선지부가 발행한 {문화조선} 4, 3(19425)는 소록도갱생원을 특집하고 있다. 그 게재기사에 소오마(ةڸ) [소록도갱생원 방문기]가 실려있는데 그 안에서 보도()과장 타카하시(׺)와 서무과장 요코카와()가 소록갱생원 수용환자의 노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소록도에 수용된 한센병환자들의 가혹한 노동의 일단(Ӯ)을 살펴보기로 하자.

 

 자동차는 동생리 병사 쪽으로 올라간다. 눈 아래로 바다가 펼쳐졌다. 조용한 봄 바다이다.

 언덕을 내려가 동생리 부두로 갔다.

 [이 부두도 환자들의 손으로 만든 겁니다. 청부공사를 할 경우 15만원이 든다고 합니다만, 그것을 불과 4개월만에 준공한 겁니다]라고 말하면서 요코카와()씨는 자동차의 정차()를 명했다.

 [어제부터 고흥군 두원면에 6,000가마의 나락을 인수하러 나가있습니다만, 오늘 오후4시에 돌아오니까 그 노동력을 한번 보십시오]라고(중략).

 이윽고 배가 부두에 도착했다. 배로부터 총지휘관인 타카하시() 보도과장이 의기양양하게 올라왔다. 배의 가마니가 한사람 한사람의 등에 지어져 양륙()되어 정미소에 운반된다. 수백명의 나환자들의 줄. 그것은 도저히 나환자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장자()들의 행렬이었다. 그것이 끝없이 해안으로 계속된다. 엄청난 장관(κ)이다. 누구 하나 투덜대는 사람이 없다. 민첩한 활동이다. 타카하시씨는 그 활동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환자의 치료에 있어서 정신의 전환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로에 의한 구원(ϭ) 거기에 이 갱생원의 특색이 있습니다. (ܻ)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하는 겁니다. 올해도 가마니 10만장, 목탄 3만섬, 벽돌 170만장, 송지() 6,000킬로그램, 토끼모피 5,000, 이 모피 제조는 중증환자의 일입니다만나병은 동물에게는 전염되지 않으며, 또 전부 소독하여 보냅니다. 대단한 근로실적입니다만 그걸 노리고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노동력은 육지 인부들의 3배반은 됩니다. 가마니 2가마면 약 30(123킬로그램)이지만 그것을 한사람이 메어 나릅니다. 그렇게 3킬로를 날라 배에다 싣습니다. 이건 완전히 정신력입니다. 감사관념의 힘인 겁니다](p.50-51).

 

 193410월부터 19419월까지 7년 간, 소록도갱생원의 서무과장으로 근무한 요시자키(ӹڸ) {조선의 구라사업과 소록도갱생원}(우방협회, 1967)에 게재한 [소록도갱생원의 건설 및 운영에 관해서] 속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남성환자의 의복류는 여성환자가 세탁하기 때문에 전혀 접촉의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고, 그런 가운데 자연히 애정이 생기는 경우도 있어 남모르게 부부관계를 맺는 사람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를 방임할 경우 환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 원내의 평화를 어지럽힐 우려가 있었으므로 남자에게 단종수술을 시술해 부부관계를 공인하고, 이에 어린이 한 명을 붙여서 부부병동에 수용하여 동거시키기로 했습니다.

 환자들이 불만스러워 하는 점들을 들자면, 섬 밖과의 자유로운 교통을 할 수 없다는 점, 사신()이 소독할 때 검열된다는 의심이 있다는 점, 급여되는 의복이 흰색이 아니게 회색이라는 점 및 신사참배를 장려한 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환자 가운데는 많은 기독교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환자의 정신지도를 신사참배에 의하려는 원()의 방침에는 약간의 저항도 있었습니다(p.36).

 수족의 절단 등으로 신체가 부자유스러운 환자는 중증병사에 수용되어, 경증환자들이 부첨인이 되어 식사, 용변 등 일체의 간호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첨인들에게는 간호수당이 나갔지만, 대부분은 부첨인이 되는 것을 기피했으며, 단지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만이 장기간에 걸쳐 중증환자, 신체부자유자의 시중을 들어주는 것이 실상이었습니다(p.37).

 

 소록도갱생원장 스호오() 동원을 [세계 제일의 요양소로 완성]했다고 정무총감 오오노()에게 서한을 보내고 있다. 3기 확장공사의 완료에 의해 부지총면적 1,487,595(491), 1940년말 현재 재원환자총수 6,137, 벽돌조의 거대한 시설을 자랑하는 요양소가 완성된 것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스호오() [창립25주년 기념식]에서 말했던 것처럼 [참으로 이상적인 낙원을 형성]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으며, [세계 제일의 요양소를 완성]하여 수용환자들을 강제노동과 함께 차별에서 비참함으로부터 구제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일찍이 193110월에 조선나병 근절책연구회의 취지문에서 제시한, [격리하는 데는 그 안전과 위안 및 의료가 없을 수 없으니 차()는 예방과 구제가 둘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이유이다]라는 정신을, 이 소록도갱생원의 [구라사업]에서 찾아내기란 곤란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나병사} 대한나관리협회, p.8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