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의 인자함]의 의미하는 것


6 조선총독부 [()]정책의 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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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갱생원은 1942620일의 스호오()원장의 살해사건 전후, 어떤 상태에 있었을까? 또한, 일본의 패전에 의해 어떻게 조선총독부의 나정책이 종언을 고하게 되었는가 살펴보기로 하자.

 

 미즈구치(Ϣ, 1915-49)19413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자마자, 즉시 소록도갱생원에 의관보(ί)로 부임, 1943년에 군의()예비원으로 소집되어 인천의 조선 포로수용소 제1분소에서 근무하게 되기까지의 2년 간을 소록도에서 지낸다. 1945년말, 미즈구치(Ϣ)는 포로학대의 전쟁법규 관습위반으로 체포되어 스가모()형무소에 구치되었다.

 그는 1949212일 미명, 교수대에 오르기까지 옥중에서 쓴 극명(к٥)한 일기를 남기고 있다(가미사카 후유코(߾) {스가모()·전범교수형} 미네르바서방, 1981).) 이외에도 아카타 테츠야(), {스가모()형무소에는 수취인이 없다}, 소화도서출판(1982), 이 미즈구치(Ϣ) 군의()의 군사재판을 미즈구치의 일기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쫓고 있다.

 

 그는 스가모()에 입소하여 7일째인 194615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젯밤은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잠들지 못한 채 공상()은 다음에서 다음으로 끊임없이 계속된다. 소록도 갱생원시대의 즐거웠던 꿈들이 아직도 잊기 어려워, 무대는 섬을 배경으로 부임(ݹ)으로부터 응소(), 섬을 떠날 때까지를 미화, 연출한 것이다.

  411, 부두에 내렸을 때부터의 아문()을 쓸 수가 있다고 상정한다. 내용은 부임, 진료, 의국, 원내의 세력다툼, 의국()의 대립, 바다 낚시, 야구, 배구, 음악, 원유회(), () 원장 조난사건, 환자 대 직원의 감정, 내선(Ү) 문제, 간호원 자살사건, 소생에 대한 직원들의 압박과 시시한 쑥덕공론 등등, 꼽아보면 얼마든지 나온다. 너무 생각하다 보니 신이 나서 정말 써 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26살에 소록도갱생원에 부임하여, 2년간의 청춘시대를 보낸 의사에게 있어, 그것은 [분명히 섬 생활은 모두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은 생각이 든다. 수개월 지나면 한 권의 이야기책이 완성될 지도 모를] 것이며, [완전히 한 몫을 하는 소설가라도 된 듯이 제목을 붙어 보았다[숙영초()]약간 로맨틱하기도 하고 다분히 센티멘탈리즘을 포함하고]있다고 미즈구치(Ϣ)의사는 기록하고 있다(p.31). 미즈구치가 온후하고 성실한 의사였다는 것은 필자도 인정하지만, 미즈구치는 소록도갱생원에 근무하는 일본인 직원의 입장에서 소록도의 생활을 보고 있는 것을 통감한다. 예를 들어 26세에 소록도갱생원에 강제수용된 조선인 환자가 1941년부터 43년까지의 환자생활을 상기한다면, 미즈구치와는 완전히 다른 감정의 기복을 경험할 것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각자가 놓여진 입장(민족, 계급)의 상위()에 근거하는 것일 것이다. 교수형의 판결이 내린 뒤인 1948723일의 미즈구치(Ϣ) [옥중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보인다.

 

 소록도라면 아마도 지금쯤은 낚시의 계절로, 전날 잡은 고기들을 자랑하는 이야기들로 의국()이 시끄러울 때이지만, 마음은 멀리 다도해()로 달려간다. 평화만 있다면, 이라고 한숨을 지며 지난날을 그린다. 나는 바닷가를 몹시 사랑한다. 바닷내음, 각종 해산물들, 위대한 자연의 무언()의 힘, 거기에는 모든 것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미즈구치(Ϣ) [옥중일기](194786)에는 [천황 히로히코()에 대한 비판]으로도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천황에 대해 일체의 경어를 쓰고 있지 않다는 점도 주목된다.

 

 토오쿄()재판에서는 천황이 문제가 되어 신문에도 보도되었으나, 그 신문의 제1면에는 천황이 토오호쿠()지방을 여행하면서 탄광을 시찰하고 있는 사진이 큼직하게 내걸고 있다.

 {()도 그대와 함께 한다}라는 말을 실행하고 있겠지만, 왠지 이상한 착각에 빠졌으며, 또한 천황이 그 날 신문을 읽었다 하더라도 필시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천황에게 우리들의 고충을 호소하려 하지도 않으며, 천황에게 책임을 지우고 도망갈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말이다. 천황이 우리들 전범자를 망각해서는 곤란하다. {짐도 그대와 함께한다}의 그대에는 당연히 우리들도 포함되어야 한다.

 

 미즈구치(Ϣ) [옥중일기]에는 [시마세() ]이라는 이름으로 소록도갱생원의 동료로 간호원이었던 시마세 하나코()의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194625일 일기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시마세() 군으로부터, 입소()이래 최초의 소식이 왔다. 이 여성은 내가 항상 안부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형편을 알게 되어 안심했다]라고 하며, 외부로부터 자신에게 온 최초의 기념할만한 소식으로서, 시마세로부터의 편지 전문을 기록해 놓고 있다. 그 시마세 하나코(, 아카타()의 저서에는 K씨로 되어있다), 아카타 테츠야()씨에게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스가모() 형무소에는 수취인이 없다} , 1982). 

 

 [이야기는 틀립니다만, 그 사람(미즈구치)은 어떤 사람들보다도 아랫사람들에게 인정이 많았어요. 소록도 시절에 조선인 사환이 있었는데 어린애가 7, 8명이나 되어그는 그 사환에게 월급을 물어보고는 [그것으로는 도저히 생활이 안되겠다]면서, 원장에게 승급()을 교섭했어요. 하지만 신임() 의관이 말이 먹혀 들어갈 리가 없지요. [안된다]고 거절당하자, 다음 날부터 그 사환에게 자기 숙소의 목욕물 덥히기, 정원청소 등을 맡기고 매번 얼마씩 품삯을 주었어요. 생활비에 보태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우리들이 싫어할 정도로 더러운 조선인 아이들도 태연하게 안아주곤 했으니까요.

 그 사람의 상사 중에 히라노()선생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선생님 댁의 무슨 잔치가 있어 저녁식사에 초대되었는데, 그걸 팽개치고 조선인 목수의 아이 생일에 가버린 적도 있었어요. 윗사람에 대해서 잘 보이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아랫사람들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인정이 많아서 잘 보살펴 주었지요]

 

 당시 소록도갱생원의 동료로, 간호원으로 있었던 사람에게 물어 보았더니 [시마세 하나코()씨는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한다. 소록도갱생원에는 이러한 일본인 의관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사람이 왜 [1944년부터 45년 사이에 인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학대, 의약품의 지급 및 의료거부로 사망에 기여, (ܻ)포로 타박 등 14항목에 걸친 전쟁법규관습 위범()]으로 기소 당해 교수형에 처해 졌을까?

 미즈구치(Ϣ) [옥중일기]에서 [이 재판은 분명히 복수다. 전쟁에 패배한 자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제재이다. 복수라면 이쪽에도 생각이 있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1947713)라고 말하는 한편, 여동생의 요리코()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전부 전쟁법규 위반이었던 모양이니, 처벌받는 것은 틀림없다](194768)라고도 쓰고 있다.

 당시 소록도갱생원의 일본인 간호원이나 의사 등 직원 가운데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일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 사람들은 환자에게 좋을 것으로 생각하여 [선의()]에서 출발한 의료행위도 있었다는 점도 인정하자. 부모, 형제자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반도 남단의 벽지에 부임하여 [구라사업]에 참가한 사람들이다. 미즈구치(Ϣ) 의사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한편 소록도갱생원이 당시의 국가 의사()에 근거한 조선인 한센병환자의 강제격리수용시설이며, 환자의 인권을 무시한 [단종],[감금],[강제노동] 등을 부과시키고 있었다는 것도, 당시의 소록도갱생원이 발행한 각 연차의 {연보}를 보면, 일본인 직원들도 알았을 것이다.

 선의()와 인권침해가 [양날의 칼]로서 조선인 한센병환자들에게 다가갔다고 생각된다.

 각지의 [()부락]이 경찰이나 행정당국에 의해서 소각되어 버린다. 그때까지는 부부,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소록도갱생원에 강제수용되어 원()의 방침대로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부부가 함께 살고 싶으면 남편은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단종]을 강요받는다. 수용된 여성이 임신을 하고 있으면 [나균이 태내(Ү) 감염한다]는 이유로 낙태를 강요 당한다. [한센병자의 아이는 한센병에 걸린다]던가 [한센병자로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불행하게 된다]는 예단(Ө)으로, 의사도 간호원도 자신이 행하는 [단종이나 낙태]의 이유로 삼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정책의 본질은 [나병]의 박멸이 아니라 [나환자]의 박멸이었다. 절대적 격리의 강화이자 [나환자]의 자손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단종]이었다.

 총독부의 나정책이나 그것을 수행한 행위에 대해서는, 사실을 밝히는 일들이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미즈구치(Ϣ) [옥중일기]를 읽고 느낀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소록도의 일본인 직원에 관해서는 분명히 수많은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기]에는, 소록도의 환자에 관한 것도, 조선인 직원에 관한 것도, 그 방대한 일기 속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와 같은 생각이 필자가 세코 후미코(ݣڸ)씨로부터 받은 편지(1999215일과 412일부) 속에도 씌어져 있다. 세토()씨의 부친이 바로 소록도갱생원의 요시자키(ӹڸ) 서무과장이며, 세토씨는 십대후반을 소록도에서 보낸 분이다.

 

 계속해서 자료(도록 포함)를 보내주시어 정말 감사합니다. 소록도와 인연을 가진 저로서는, 하나 하나의 자료가 그립기도 하고 또 꺼림칙한 것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잊지 않도록 할 생각입니다.

 직원의 자제로서(저의 십대 후반)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었습니다만, 이 정도까지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215일자). 

 편지와 [조선총독부의 나()정책과 그 종언]이라는 문장도 감사히 받았습니다. 미발표의 것을 미리 읽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즈구치(Ϣ)의사에 관한 것은 [아스카 통신]의 미요시(߲)씨가 보내주셔서 알고 있었습니다만, 일기의 내용은 처음입니다. 미즈구치(Ϣ)씨와 만난 적은 있지만 이야기한 적은 없습니다.

 학생 시절 만도린 클럽의 일원으로 위문을 왔다가 소록도가 마음에 들어 졸업 후에 부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과 2년 간이라고는 하지만, 일기에 쓰여져 있는 것처럼 [즐거웠던 꿈]이야기 이며, [숙영초()]였다고 생각됩니다. 타키오(ڭ)씨의 말씀대로 그것은 일방적인 감개이며, 환자들의 생활은 로맨틱, 센티멘탈리즘 등과는 거리가 먼 가혹한 현실의 나날들이었다는 것은 타키오씨가 조사하신 그대로입니다.

{평화만 있다면, 이라고 한숨을 지며 지난날을 그린다}라는 말이 계속되는 일기의 문장도 온화한 성격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죽음을 앞에 두고 미화(ڸ)된 생각이며, 소록도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환자의 일들을 생각하지 않고, 직원 측에서만 본다면 소록도는 {바닷내음, 각종 해산물들, 위대한 자연의 무언()의 힘}을 가진 아름다운 섬이며, 해수욕은 집에서 수영복을 입은 채로 갈 수가 있으며, 만월(ػ)의 바다를 보면서 헤엄치는 즐거움, 해안의 산책, 외부인들은 아무도 낚시를 하러 오지 않는 바다는, 작은 배를 내어서 가면 하룻밤 또는 하루에, 수십마리의 다양한 물고기들을 낚을 수가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도 원장님과 가끔 뱃사공을 데리고 미끼(환자들에게 잡도록 합니다)를 듬뿍 가지고 임금님과 같은 낚시를 하곤 했습니다. 외부에서 견학을 온 분이나 총독부에서 시찰을 온 관계자 분들은, 환자들의 낙원처럼 보일 것입니다. 타키오(ڭ)씨가 의문을 가지시고 한센병사를 쓰시게 된 것은, 진실을 전하고 역사상의 {조선의 구라사업과 소록도갱생원}의 새로운 증명이 될 것입니다(412일부).

 

 스호오()원장이 살해당한 뒤, 5대원장으로 소록도갱생원에 부임한 사람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위생과장이자 조선나예방협회 상무이사였던 니시키 산케이(߲Ф)이다. 니시키()19234월에 총독부 위생과에서 근무를 시작한 이래,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관계하여 왔다. 원장이 된 니시키()는 동요하고 있는 원내를 진정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환자들의 원한의 대상이었던 사토 미요지(߲) 수석간호장을 면직시키고, 직원들이 환자를 대할 때는 부드럽게 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스스로도 솔선하여 환자에게 경어를 썼다. 1943년에는 각종의 범종()을 비롯하여, 교회의 성종(), 그리고 스호오()의 동상까지가 철거되어 군수용으로 헌납되었다.

 대한나관리협회편 {한국나병사}(1988)는 전쟁말기의 소록도갱생원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쌀이나 보리로 지급하던 식량이 짐승먹이로도 못 쓸 만큼 조악()한 품질의 옥수수, 콩깻묵, 수수만으로 바뀌었는데, 이것마저도 모자라 빈터마다 에는 호박, 고구마 등을 심어 보태야 했고, 그러고서도 해초나 풀뿌리, 나무껍질로 배를 채웠다. 중노동과 수탈 거기에 기아()까지 겹치는 고난을 견디다 못한 환자들의 탈출은 이때 최고조에 달했다. 이 때문에 밤 8시가 되면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한동안 완화되었던 인원점호가 엄해졌다(p.116).

 

 1945814, 일본은 연합군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15일 정오에 전쟁종결의 조서()가 방송되었다. 조선인들은 이로서 36년 간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그러나 소록도의 환자들은 이 사실을 3일 뒤인 818일에야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사정에 관해 모리타(ߵۻ) {조선 종전의 기록}(, 1964)은 니시키(߲Ф) [종전당시의 소록도]({동화()} 70)에 의거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긴 문장이지만 소개한다.

 

 전라남도에서 가장 큰 폭동이 있었던 것은 고흥군 금산면의 소록도이다. 여기는 조선인 나()환자 약6,000명을 수용한 세계 제일의 시설을 자랑하는 갱생원이 있다. 8월 초, 큰 폭풍우 때문에 전신전화가 고장이 나서 라디오도 들을 수가 없어, 소록도 재주자들은 15일의 방송도 몰랐다. 우연히 섬에 와있던 광주와 대구의 검사정() 앞으로 고흥주재소에서 암호전보가 와서 종전()을 전했지만, 두 사람 모두 모략()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갱생원 직원으로 응소() 중인 자들이 제대()가 되고, 그들이 가지고 돌아온 [전남신보]에 의해 17일에야 비로소 종전()이 분명해지게 되었다.

 18일 아침, 갱생원장 니시키(߲Ф)는 직원들에게 종전에 처한 훈시를 행했다. 그 직후 약 300명의 조선인 직원은 [치안유지회]라는 이름으로 대회를 열고 갱생원의 접수를 요구함과 동시에 소록도신사를 불태우고 만세를 외쳤다. 조선인 직원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갱생원을 경영하고자 하는데 대해, 환자(조선인)측은 자치위원회의 이름 하에서 스스로 경영할 방침을 세워 20조에 달하는 주장을 하면서 양보하지 않았다. 19일에는 소록도형무소에 있던 수형자 70명이 탈옥하여, 일반환자들과 함께 조선인 직원을 습격했다. 조선인 직원들이 도망하여 대안()에 구제를 요구했기 때문에 무장한 조선인이 달려가 폭동을 일으킨 환자에게 발포(ۡ)함으로서 환자 측의 희생은 수십 명에 달했다고 한다.

 22일에 일본군이 출동함으로서 소동이 겨우 진정되었다. 그 동안 소록도내의 일본인 약 200여명은 공회당에 집결해 있었으며, 사건에 말려들지 않은 관계로 희생자도 없었다. 24일에 일본군이 철퇴할 때 일본인들은 군()과 행동을 같이 하여, 벌교를 경유하여 여수로 나와 철수했다(p.91).

 

 819일의 소록도 한센병환자 학살사건에 관해, 한하운은 [한국나환자 학살사]를 써서 기록을 남겼다. 그것은 김창직() 편저 {가도가도 황토길한하운 그 슬픈 생애와 시}(지문사, 1982)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전후 니시키(߲Ф)는 어떤 길을 걸었을까? 쿠류우() 낙천원 환자자치회저·발행 {풍설()의 문장(ڣ)}(1982)에 의하면, 1949930일부터 니시키 후생기관은 국립 한센병요양소 쿠류우() 낙천원에 근무한 것으로 되어있다. 당시 니시키()65세였다. 다음해인 506월에는 동원의 의무과장이 되고, 5251일부로 국립 스루가()요양소로 배치가 바뀔 때까지 동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니시키(߲Ф)가 쿠류우() 낙천원에 근무하던 1951118, 참의원 후생위원회의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조사건] 가운데서 하야시(), 미츠다(), 미야자키()의 세 원장은 [()에 관한 건]으로서 국회증언을 하여 큰 문제가 되었다. 니시키()도 또한 30여년간에 걸친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관계하면서, 반성하는 일도 없이 전후()의 한센병요양소의 간부직원으로서 동소()의 의료활동을 하고 있다.

 [우방협회]1950년 가을, () 조선총독부 식산국장 고(ͺ) 호즈미(߲)의 제창에 의해, 일본에 의한 조선통치의 자료보존을 위해, 관계문헌자료의 조사·수집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동 협회가 196710월에 발행한 {조선의 구라사업과 소록도갱생원}(우방시리즈·제9)라는 책자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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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제() [조선의 구라사업와 소록도갱생원]은 그 인간애와 규모의 웅대함에 있어 세계의 눈과 귀를 모은, 우리 조선통치의 본질을 표징()하는 선정()으로서 찬양 받은, 총독통치가 자랑해야할 유업이다.

 

 저자가 [일본·조선 근대한센병사]의 연구를 시작한 것은 [우방협회]가 말하는 것처럼 소록도갱생원이 [우리 조선통치의 본질을 표징하는 선정으로서 찬양 받은, 총독통치가 자랑해야할 유업]인가의 여부()를 분명히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