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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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1 소록도병원 입원자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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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저(٣) {아으 70, 찬란한 슬픔의 소록도}(1993)의 집필자인 심전황()씨로부터, 다음과 같은 1998년도의 [연하장]이 왔기에 소개한다. ()씨는 오랫동안 소록도의 한센병요양소에 환자로서 입원해 있으면서 정력적으로 문화활동에 관계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가족과 함께 전라북도에 있는 한센병 회복자들의 정착마을인 [익산농장]에서 생활하고 있다.

 필자도 세 번 정도 익산의 심()씨 댁을 방문한 바 있으며, 서신왕래도 계속하고 있다조선한센병사 연구의 선배이다.

 

 삼가 신년 인사말씀 드립니다. (중략) 그런데 지금 한국은 참담한 국가경제의 실책으로 사회봉사부문의 예산도 크게 삭감되었고, 또한 하루하루 물가가 오르고 생활필수품도 제품이 부족하여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정착마을의 우리들이 자활()의 수단으로 기르고 있는 가축도 사료가격이 폭등하여 물건을 사려고 해도 살수가 없는 제품부족 상태이며, 생산코스트가 높아져 수지를 맞출 수가 없기 때문에, 가축들을 [죽여서] 전부 땅 속에 묻고 있는 실정입니다. 국가의 달러부족으로 인한 IMF로부터의 차입() 태풍과 함께, 겨울의 엄한 한파의 내습으로 정착마을 사람들은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집착의 념(ҷ)으로 몸도 마음도 얼어붙어 있습니다. 1227, 심전황 근배()].

 

 한국경제의 붕괴인가, 라고 생각되던 [IMF(국제통화기금)부터의 차입] 전후의 작년(1997) 12월 상순, 필자는 TBS(도쿄방송) 뉴스23의 특별프로그램인 [또 하나의 강제불임한국·식민지에서의 강제단종]의 취재협력을 위해 10일간 한국에 체재하고 있었다(이 특별 프로그램은 TBS 계통의 TV국을 통해 1222일 밤, 전국에 방영되었다).

 필자가 한국에 입국한 121일에는 100엔이 850원이던 교환비율이, 출국하던 1210일에는 100엔이 1,300원으로 한국의 통화()는 하락하고 있었다. 9월 당시를 생각하면 반액에 가깝게 원화 값이 떨어진 셈이다.

 한국 정착촌의 돼지, 닭 등의 가축사료의 대부분은 해외에 의존하고 있으며, 사육된 가축은 주로 한국국내에서 소비된다. 그런 가운데 정착촌의 가축사업은 [수지가 맞지 않아 가축을 전부 땅속에 묻게]되고 말았다. 우리들이 소록도를 찾은 것은 그러한 시기였다.

 우리들은 소록도 원생자치회와 [참길]복지사회연구회 등의 전면적인 협력을 얻어, 뉴스23의 특별프로그램 취재를 할 수 있었다. 그 때 TBS 뉴스 카메라맨이 찍은 필름은 전부 5시간분에 달했다. 그러나 특별 프로그램으로서 1222일 밤 [츠쿠시 테츠야() 뉴스23]에서 방영된 것은 불과 15분간에 불과했다. 그 당시 취재의 중심부분이었던 네 사람의 소록도입원환자의 증언일본의 조선통치시대의 체험과, 그에 대한 현재의 생각들을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자. 증언을 들은 사람은 이인철()씨와 필자 두 사람이었다. 이씨는 전() 동아일보, () 한겨레신문의 논설위원이다. 네 사람의 증언은 각자의 양해 아래, 각자의 방에서 행해졌으며, 증언해 주신 두 사람의 할아버지 A씨와 C씨는 실명(٥)한 분이다.

 

소록도 인터뷰129일 오전 859분부터 오전 935분까지

 (부부)

▶할아버지(25살 때 입원. 86), A

 25살 때 왔다. 마을에. [단종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걸 하면 결혼시켜 준다고 했다. [부부가 함께 살 수 있는 집도 지어준다]. 우물을 파고, 집을 지어, 동짓달에.

 원장(스호오() 4대원장)의 동상을 세워야 하는데원장의 동상을 세우기 위해서 돈을 내지 않으면 안되고, 어쨌든 우리들이 뭐든지 전부 제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일하면 하루에 3, 좀 더 일하는 사람은 5, 이라고 말했지만 한푼도 주지 않았다. 동상을 세우고 난(19408) 뒤에는, 새벽 3시에 동상을 참배하라고 했다. [원장선생님 감사합니다]라고 참배하러 가야만 했다. 동상참배신사참배그걸 하지 않으면 매국노다, 반항자라는 말을 들었다. 이 새끼 왜 하지 않는 거야 라고 말했지만 [나는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그런 일은 할 수 없다]라고 대답해 감금실에 들어가서 죽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TBS의 통역에 의하면 [사투리(방언)가 심해 거의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할머니(16살 때 입원. 77), B

 원장선생님(스호오 4대원장)의 동상숭배를 하라고 해서, 언제나 한 달에 한번은 사람들을 전부 모으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6,000명이 이 섬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게 전부 모이면, 정말 사람들이 많았지요. 여기는 어디 어디 사람들이라고 부락(그 당시 여섯 개의 부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별로 열을 짓습니다. [차렷!]이라는 구령을 부른다. 그런데 제 옆에 서 있던 사람이 이렇게 계속해서 손을 옷 속에 넣고 있어요, 여름의 더울 때인데.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 이유를 몰랐어요.

 차가 왔어요. 차가 와서 멈추고.

 원장은 조금 뒤에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차 있는 곳으로 그 사람(이춘상(), 원내에서는 이춘성()이라 불렀다. 당시 27)이 다가가서 원장의 목을 힘껏 틀어쥐고, 그 때 손이 보였는데 칼은 이렇게, 손가락이 없으니까 붕대로 둘둘 말아 붙들어 매어서, 콱 찌른 겁니다. 나는 놀라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무서워서.

 모두 집에 돌아가 있으라고 했습니다(월례 보은감사행사의 날인 1942620, 스호오()는 환자 이춘상에 의해 살해 당했다).

 저는 집에서 아이고 이제 우리들 4,000명은 다 죽었구나. 원장이 죽었으니 우리들도 다 죽었다고. 원장 아들은 일본의 굉장히 높은 사람,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니까, 우리들을 모두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에 있었다. 원장을 죽인 사람그 사람은 이런 식으로 둘러싸여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범인은 맞아 죽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범인은 [6,000명 환자를 대신해서 내가 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위해 한 것이 아니라, 여기의 상태가 너무나도 지독하고 사람들이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고. 그리고는 손발이 없는 몸인데도 저에게 [걱정하지 말라, 잘 있어]라고 하면서 끌려갔습니다.

 전부 떨고 있었다. 원장은 죽었다. 원장 아들이 왔다고 일본에서. 우리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우리들은 무서워 떨면서, 전부 죽는다는 생각에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장 아들이 말했습니다. [여러분 무서워하지 말고 안심해 달라. 아버지는 너무 지독한 짓을 하여 여러분을 괴롭혔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아버지는 가야될 곳에 간 것이니까 여러분은 부디 안심해 달라]라고. 그런 말을 들어도 여전히 두려웠지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소록도 인터뷰  129일 오전 1002분부터 오전 1020분까지

▶할아버지(70), C

 나는 70세입니다. 3(1933년인가?) 1023일날 입소했습니다. 그 당시의 원장은(스호오)라는 일본의 해군 대장급의 사람이었습니다. 역대 원장들 중에서 가장 정치력이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첫째로 4, 5년 분의 식량을 비축한 점, 다음으로 농기구 등을 빠짐없이 갖추어 둔 점 등이 좋은 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때, 41년도쯤 되어 최초의 사람들이 나갈 때, 200쌍의 사람들이 나갔습니다. 200. 그 사람들은 모두가 단종수술을 하고 나갔습니다.

(질문 : 한번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때부터 독일의 잔혹한 방식을 흉내하여 일본도 강제적으로 단종(Ө)이라는 것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는 45815일의 종전()까지 그것이 계속되었으며, 더욱 더 잔인한 것은 임신한 여성의 신체로부터 중절()로 끄집어 낸 태아를 알콜에 담구어, 그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놓아두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당시의 감금실 아래에 있었던 그 장소가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몇 년 전에 정부가 철거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만 그게 아직까지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또, 조그마한 일이라도, 말하는 것을 듣지 않았다거나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환자들에게 엄청난 학대를 가했습니다. 거기다가 감금실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독한 곳으로, 감금실에 들어간 사람들은 여름에는 더위로 죽고, 겨울은 얼어죽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수는 셀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잔학한 방식, 그 지독함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은 내가 입소하기 전부터 있었던 일로 나이 드신 분들에게 들었으며, 저 자신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다음에 내가 여기에 들어온 것은 6,766번째였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때 명치(٥)대학을 나온 사람이 있어서(이하 불명료.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벽돌100만개][개척의 강제][일본정부에 착취][당시의 시가][반이라도 배상해주면] ). 

 일본정부, 즉 원장은 정치력도 있는 해군 대장급이기는 했지만, 우리들 환자에 대하여는 그렇게 지독한 처사를 일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루에 정말로 얼마 되지 않은 음식물 밖에 얻어먹지 못하면서 일을 한 것입니다.

 다음에 사토()라는 원장(사토는 소록도갱생원의 수석간호장)이 왔습니다만, 그 사람은 환자들에 대해 더욱 가혹한 방식을 취했습니다. 나도 얻어맞아서, 이 허리 근처입니다만 지금도 가끔 아픕니다. 70이 다된 지금도, 이러한 잔인한 방법은, 당시의 소록도에서도.

 당시 나는 아이였기 때문에 정치도 몰랐고, 일본이나 독일, 한국조차도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어떤 사람의 이야기로서는 일본의 어떤 원장과 같은 지독한 방식은, 그처럼 지독한 방식은, 온 세계의 나병원을 찾아보더라도 그런 예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942년인가 43년의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파상풍이라는 것이 있잖습니까? 인체에 들어가면 허리가 다 늘어져 버립니다. 일본은 당시 여기에 환자가 많다고 하여, 그 중에서도 나을 가망이 없는 사람에게, 그것을 산 몸에다 주사를 했다고 합니다. 정말로 그처럼 잔학한 인간들이 있었다는 게 불가사의할 뿐입니다. 정말로 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나환자를 치료한다고 하고는, 파상풍 연구에 환자를 사용하여 생체실험을 하다니.

 (질문 : 단종수술은 누가, , 어떻게 했습니까?)

  저는 단종수술을 1941년에 받았습니다만, 단종은 41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입니다. 그리고 사토()원장(수석간호장-필자) 때에는 참기 어려운 굶주림과 중노동, 그리고 가혹한 취급이 심했기 때문에 탈주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탈주하다 붙잡히면 무조건 단종수술입니다. 또 그 외에도 원내에서 반일적이거나 반항적이라고 찍히게 되면 단종입니다. 그리고 원내에서 물건을 훔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나도 단종입니다. 단종이라는 것이 시작되면서 소록도에서는 남녀관계 있었다거나 할 경우에는 무조건 단종수술이 가해지게 되었습니다. 왜 단종수술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독일에서 나환자 등에게 그것을 행하는 법률이 있었잖아요. 따라서 일본정부도 [나환자들은 전혀 치유될 가망성이 없다. 아기를 낳더라도 까마귀 새끼는 까마귀이고 승냥이 새끼는 승냥이일 뿐이다]라는 생각에서, 환자들은 아기를 가질 수 없도록 해 버린 겁니다. 단종이란 정말로 잔혹한 방법입니다. 정말 뭐라고 입으로 말할 수가 없어요. 시대의 잘못이라고 하지만.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고 억울해서.

 내 나라, 한국이라는 모국 땅에서 도대체 왜 이런 지독한 꼴을 당해야 했는지.

 한센병 환자도 세계 곳곳에서 다들 잘 살고 있으며, 환자들의 아들딸들도 [한센병]에 걸리지 않은 채 건강하게 자라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아이를 만들 수 있는 몸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어요. 아이를 낳을 수 없는데 대마도를 내게 준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 나이가 되어 이런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만일에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벌써 자살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병에 걸려, 그런 수술까지 당한 환자들은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벌써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입소하여 환자들 중에서는 젊은 편이었기에 지금까지 살아 있지만 단종의 경위는 대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 C할아버지는 13살 때 땔나무 감으로, 무단(Ө)으로 작은 나뭇가지를 꺾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처벌로서 단종수술을 받았다). 

 

 소록도 인터뷰 129일 오전1050분으로부터 오전 1108분까지

▶할아버지(79), D

 단종을 한 사람은 여러 종류이다. 여러 가지. 부부가 동거하는 경우는 남자가 수술. 그리고 나쁜 짓을 한 범죄자는 수술. 그리고 형무소를 나와 여기에 입원한 사람은 무조건 모두 수술. 연료가 귀했기 때문에, 멋대로 나뭇가지나 잎을 모아서 태운 사람도 단종. 장작이 배급되었지만 모자랐다. 나는 (단종수술을) 안했습니다

 (질문 : 어떤 고생을?)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일이 있으므로 고생도 다르다. 나는 짐을 나르는 일을 했습니다.

 젊고 튼튼했으니까. 당시 원()에는 6,000명 이상의 환자가 있었기 때문에, 너는 짐을 날라라, 너는 이것 이것을 해라, 라는 식으로 일을 할당받고 있었습니다.

 (질문 : 기술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은 아무 필요가 없어

 (질문 : 대학을 나온 사람도 있었다는데?)

 그 사람은 몸이 약해서 말이야. 대구출신으로 명치대학을 나온 사람인데 국민학교 교장을 하고 있었어요. 중학교는 해방이 된 다음에. 일제시대는 국민학교 뿐이었습니다.

 (질문 : 결혼한 지는 얼마나?)

 이 사람과 같이 살게된 지 올해로 30. 앞의 사람과 10년 살았으니까 합쳐서 40년입니다.

 (질문 : 일본인 원장이 있을 때 결혼한 겁니까?)

 아니, 그 때가 아닙니다. 그 때는 너무 어렸으니까.

 (질문 : 결혼하고 나면 수술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 때는 약속(?)이 있었던 겁니다. 그 때의 원장이 환자들에게 조금은 잘 해주어서, 우리들에게 자유를 주도록 했습니다. 결혼의 자유, 언론의 자유, 단종수술에 대한 자유, 세 가지입니다. 그러나, 결혼하면 수술을 해야 한다. 가족(부부)용의 집도 지었습니다(1957년경의 이야기인가?). 

 (질문 : 할아버지는 수술하지 않았지만, 그 앞의 사람들은 모두 수술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질문 : 살아있는 사람들은)

 전부 벌써 죽었습니다. 죽어 버렸습니다. 아이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벌써 전부 80살이 넘은 나이니까. 그래서 소화15(1940)(섬의 중앙)공원의 공사를 했는데, 그 때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리어카는 있었지만 다른 기구는 아무것도 없어서 전부 사람들이 날랐어요.

 여자들은 머리에 흙을 지고. 거기는 옛날에 논이었던 곳입니다. 거기를 정지()할 때에는 일본인들이 와서 땅을 고른다거나 나무를 심는다거나 전부 계획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공원에서 쓰는 것은 일본에서 일부러 가져 왔기 때문에, 나무도 일본에서 가지고 와 심고. 큰 소나무가 운동장의 옆에도 있었지요? 그것도 당시에 심은 것입니다.

 (질문 : 하루에 몇 시간 일했습니까?)

 그거야 정말 1년 내내 밤도 낮도 없이. 잘 때도 모두 모여 한 군데서 자며 일했습니다. 그리고 하루의 작업이 3()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큰 사건은, 아까 이야기하던 단종수술도 큰일이었지만, 오오사카()의 의사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일본의 군인, 거 있잖아요, 군대에서 의사를 하는 사람. 그래 군의(). 그 군의가 단종수술도 했고 의학 연구도 여러 가지 하고 있었는데. 24시간만에 경련이 일어나는 주사. 모두들 [경련주사]라고 불렀습니다.

 얼굴이 이런 식으로 경련을 일으킵니다. 주사하고 나면 24시간만에 죽어요. 그 때문에 사람들이 정말 많이 죽었어요. 사토(߲)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일본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환자들에게 노동을 시키곤 했는데 그 사람 손에 죽은 사람의 수도 엄청난 숫자입니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것 같은 특별히 바닥이 철판으로 된 방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징벌을 받아 죽은 겁니다, 환자들이. 나쁜 짓을 했다고 환자들을 끌고 가서는 벌()로 죽이는 겁니다.   감금실에 들어가면 죽어서 나와요. 그런 식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질문 : 자기 눈으로 본 겁니까?)

 그래요. 나는 운반조와 여러 가지 조에 있었는데, 모두들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오오사카의 군의()가 있을 때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환자들도 이런 일들에 대해 소란스러웠고, 공원에 모여 너무나도 비인도적이라고 상의하기도 했습니다. 환자들을 몇 백명이나 죽이고 그런 소란이 일어나고. 그러나 사토()는 환자들이 순종을 하고 있는지, 말들이 많은지를 살펴보고 있다가 말이 많은 사람은 죽여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아무리 유순하게 일하고 있어도, 한번 눈에 나면 전부 죽여버립니다. 살아 나온 사람이 없어요. 공원 옆에 있는 그 감금실에서.

 소화17, 8(1942,44) 경에는 먹을 것을 조금 밖에 받질 못했어요. 밥그릇에 밀가루를 그야말로 조끔. 거기에다 노동은 중노동.

 (질문 : 일제시대의 생활을 지금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야기가 안돼요. 그렇게 괴로운 꼴을 당하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모두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나는 옛날 일은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옛날 일을 생각하면서는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부기(ݾ

 한센병요양소가 있는 소록도는 한국 전라남도 남단의 항구도시인 녹동()의 대안() 600미터에 위치하는 작은 섬이다. 일본의 조선통치시대인 19162, 조선총독부에 의해 소록도에 한센병요양소가 개설되었다. 개설 당시의 환자수용정원은 100명이었다.

 193212, [조선 나예방협회]가 총독부의 주도로 설립되면서 조선 전국에서 반강제적으로 [모금]이 행해져, 그 풍부한 자금과 행정권력에 의해 소록도의 140여호, 900여명의 도민 전원을 섬 밖으로 이주시키고, 1939년까지 한센병환자 6,000명의 수용이 가능한 시설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 섬에 조선 각지의 한센병환자를 강제격리·수용했다. 이 요양소 시설은 다수의 수용환자들의 강제적인 노동에 의해 건설되었다.

 조선총독 우가키()1935420일 제령(ֵ)으로 [조선나예방령]를 공포하고, 부령에 의해 동 [시행규칙]을 동년 61일부터 시행하여, 나요양소장에게 수용환자의 [징계·검속]권한을 부여했다.

 19364월에는 종래의 부부환자별거의 원칙을 개정하여 [내지(Ү)와 같이] 부부동거를 허락했으나 그 조건으로서 남성환자의 정관절제수술(단종)을 실시했다. 동 진료소의 {연보}에 의하면 1940년말 현재의 부부동거자는 840쌍에 달하고 있다.

 환자의 단종은 직원에 대항하는 자들과 도망하는 자들에 대한 벌칙으로서도 행해졌다. 동도()에는 일본통치시대에 세워진 붉은 벽돌로 지은 감금소와 형무소 건물이 남아있다. 그리고 현재, 국립 소록도요양소에는 아직도 994명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고 있다. 증언 가운데의 괄호부분은 필자가 보주()한 것이며, 사진은 19954월에 촬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