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보고()2 부산의 용호(ף)농장(정착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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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ث)양은 초등학교 3학년이다

 올해(1997) 38일의 토, 일요일의 연휴를 이용하여 후쿠야마(ߣ)의 초등학교 교사인 엄마와 함께 나가시마() 애생원에 놀러온 것이다. 한 살 위의 오빠인 유우야()군과 신나게 언덕 위의 공원으로 뛰어올라 갔으나.

 [엄마, 이 공원에는 미끄럼틀도 없고 그네도 없어. 왜 그래?]

 [이 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만 살고 있기 때문이야. 아이들이 없으니까!]

 [이 섬에는 왜 아이들이 없어?]

 마이(ث)의 이 소박한 의문에 대해, 필자는 마이(ث)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대답해야 한다. 미끄럼틀과 그네에서 놀 수 없는 마이(ث)는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아빠, 도대체 역사()가 무슨 도움이 되는 거에요. 나한테 설명해 주세요].

 한 소년의 이 소박하고 솔직한 의문에 대해, 프랑스의 위대한 중세사가(ʫ) 마르크 블록(Marc Block, 1888-1944) {역사를 위한 변명}을 쓰기 위한 붓을 잡았다. 그러나 책이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 독일 레지스땅스에 가입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1944616일에 총살된다. 그의 곁에는 16세의 소년이 떨면서 서 있었다. [저걸 맞으면 아플까요?] 노학자는 애정을 가득 담아 그 소년의 손을 잡으면서 [그렇지 않아. 아플 리가 없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 노학자는 [프랑스 만세]를 외치면서 독일군의 총탄에 쓰러진다(사누이 테츠오() [마르크 블록에 대하여]).

 필자가 마르크 블록 저, 사누이 테츠오() {역사를 위한 변명역사가의 할 일}(), 1956)을 처음으로 읽은 것은, 지금부터 40년 전. 그 이후, 좌우()의 서적으로 이 책을 읽고 있지만, 이 부분, 이 페이지를 펼칠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마르크 블록은 다음과 같은 말을 우리들에게 남기고 있다.

 

 역사의 대상은 그 성질상 인간이다. 더 적절히 말하면 인간들이다. (중략)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은, 기껏해야 박식()한 미숙련 노동자에게 불과할 것이다. 좋은 역사가란, 전설의 식인귀(С)에 닮아있다. 그가 인간의 살코기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 바로 거기에 사냥감이 있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p.8).

 

 저녁때가 되어 어머니인 이쿠코()씨는 마이(ث)와 유우야()군을 데리고 바닷물이 빠져나간 [애생회관] 앞 해안에 조개를 잡으러 나갔다. 조개도 잡고 새끼 게()도 잡은 마이(ث)양과 유우야()군은 몹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해안 모래밭에 나와 있던 아주머니에게 조개 잡는 방법을 배웠다고, 숙사인 [은사료()]에 돌아와 우리 어른들에게 즐거운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은 마이(ث)일행이 잡아온 조개로 국을 끓여 먹었다. 히로시마()로부터 나가시마 애생원을 방문한 우리 일행은, 오전 중에 {애생}지 편집부의 후타미 미치코(̸ڸ, 당시 81)씨를 방문하여, ()의 역사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아침에 잡수신 조개는 씨알이 작았을 겁니다. 옛날에는 쌀뜨물이 해안으로 흘러들었기 때문에 큰 조개가 많이 잡혔습니다만. 초대원장인 미츠다() 선생님이 나가시마에 애생원()이 처음 건립되었을 때, 환자들의 부식거리라고 되리라는 생각에서 다른 곳에서 씨조개를 얻어다 해변에 뿌린 것이 지금 잡히는 조개의 선조()입니다]

 

 후타미(̸)씨는 한센병이 발병하여 이 섬에서 살게 된지 50년 가까이 된다고 하며, 나가시마에 관한 일은 깜짝 놀랄 정도로 잘 알고 계신다. 월간 {애생}지에 [나가시마의 식물]이라는 제목으로 표지의 그림은 물론, 그것이 나가시마의 어디에서 생육하는지에 대해 연재기사를 쓰고 있으며, 필자도 후타미씨의 [나가시마의 식물]을 애독하는 애독자의 한 사람이다.

 한센병요양소에 입소하고 있는 노인들로부터 [생활의 역사]를 배우려고, 필자도 {애생}지에  연재기사를 쓰고 있다. 금년 29일에 필자는 한국·부산의 한센병 회복자의 마을인 용호(ף)농장을 방문했다. 그래서 견문하고 배운 일들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29일은 한국의 구정()연휴의 이틀째에 해당하는 날이었다. 신문도 휴간이며 가게도 정월휴가로 문을 닫은 곳이 많다. 마침 부산역 앞의 대중식당이 열려 있어, 한식 조반을 들었다. 신혼의 젊은 부부들이 전통적인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를 입고 아침밥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기에도 정겹다.

 그 날은 예정대로 한센병 회복자의 마을인 용호농장 안에 있는 상애()교회를, 친구인 카와세()씨와 함께 방문하기로 했다. 전날 밤, 용호농장(용호2)에 사는 허동규(Х)씨에게 전화를 하여 상애교회의 [주일예배]가 오전 11시부터라는 것을 알아두었다.

 [교회에서 어린이회를 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방문해 주세요]라고 한다. 예배가 시작되기 30분전쯤에 교회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해 두었다.

 허동규(Х)씨는 27세의 독신 청년으로 출생은 부산이 아니지만 할아버지가 한센병환자로 용호농장에 있었기 때문에 이 농장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오카야마(˪ߣ)대학에서 1년간 농축산학을 배운 적이 있어 일본어의 읽기, 쓰기와 회화에 능숙하다. 최근에는 일본어의 가이드 시험을 위해 낮에는 학원에 다니지만, [일요일은 하루 종일, 거의 상애교회에 있으니까 꼭 한번 교회를 찾아주세요]라는 편지가, 히로시마()에게 있을 때 왔었다.

 

 용호농장을 방문하는 것은 작년(1996) 1027일과 금년 128일에 이어, 이번이 3번째 방문이다. 용호농장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꼭 한번 찾아보라고 추천해 주신 분은 재일교포로 조선문학과 조선근대사의 연구자인 최()선생님이었다. 최선생의 아버지의 남동생, 즉 아저씨가 한센병환자였기 때문에, 최선생은 아저씨와 함께 쿄오토(Դ)대학 피부과 특별연구실의 오가사하라(آ) 교수(18881970)를 여러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오가사하라(آ) 교수는 한센병환자의 [강제격리, 단종]에 반대하여 외래진찰과 입원치료를 주장하고 실행한 의사이다. 최선생의 아저씨는 해방 후, 한국으로 건너와 용호농장에서 사망했다.

 [타키오(ڭ), 부산에 갈 기회가 있으면 용호농장을 한번 찾아보는 게 좋을거요]라고 최선생도 말씀하셨지만, 필자도 꼭 한번 찾아보고 싶었다.

 부산역 앞의 택시정류장에는 노랑색 표식의 [모범택시]와 파랑색 표식의 [보통택시]2종류가 있다. [모범택시]의 기사 쪽이 갖가지 편의를 봐주어 편리이지만 요금이 비싸다. [보통택시]라면 부산역에서 용호농장까지 7,000원 정도로 갈 수가 있다. [용호농장]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오륙도(׿)]라고 말하는 편이 운전기사들에게는 잘 통한다.

 오륙도까지 차로 가서, 오던 길을 100미터 정도 되돌아가면 거기가 용호농장이다. 오륙도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의 가사에도 나오는 [명소(٣)]이다. 부산항의 출입구에 위치하는 이 섬은 썰물 때에는 여섯 개의 섬이던 것이, 만조가 되면 한 개의 섬이 파도사이에 숨어버려 다섯 개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되었다고 한다. 부산항을 한 눈에 바라 볼 수가 있으며, 낚시꾼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큰 닭장이 있는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면 왼쪽 편의 도로 옆 문기둥에 [대한기독교장로회 상애교회]라고 쓰여져 있고, 그 곁에는 끝이 뾰족한 사각의 석비()가 서 있다.

 석비 정면에는 [대영() 나병자 구라회 기념비]라고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창립 주후() 190910, 주후 19305월 부산나병원 일동]이라고 새겨져 있다. 측면에는 [부산나병원 창립공로자]라고 하여, 심익순(), 어을빈(ޯ), 사목사()의 세 사람의 이름과 [관리자]로서 매견시(̸)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어을빈(ޯ)이란 어빈(Ervin)을 말한다.

 19093, 어빈은 경상남도 동래군 서면에 나()병원을 창설, 동년 10월에 [상애교회]를 설립했다. 관리자로 되어 있는 매견시(̸)란 맥켄지(N. Mackenzie)를 말하는 것으로, 어빈의 뒤를 이어 영국 구라선교회(British Mission to Leper)의 지원을 받아 19114월에 부산나병원을 설립하고, 동회의 지원으로 시설을 확장하면서 오랫동안 관리자(병원장)를 역임했다. 그는 스콧틀랜드 출신의 의료선교사로, 73세의 고령까지 이 병원에서 근무했다.

 

 완만한 언덕길을 올라선 곳에 멋진 상애교회와 그에 인접한 4층의 교회부속건물이 서 있다.

 그 속에 집회실과 목사님이 거주하는 방이 있으며, 어린이회도 이 건물 안에서 행해지고 있다. 교회 앞 광장에는 미끄럼틀과 정글짐이 있어 어린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다. 여기서는 멀리 오륙도가 바라보이며, 1,500명의 주민이 있는 용호농장도 한 눈에 들어온다. 상애교회 이외에도 2개의 교회가 있는데, 그 하나는 천주교(Catholic) 교회이다. 용호농장에는 자동차 부품제조공장과 석재가공 공장 등이 세워져 있었다.

 정월의 설빔으로 바지저고리, 치마저고리를 입은 귀여운 어린이들이 부모들과 함께 상애교회로 찾아든다. 마이크로버스를 탄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교회에 모여든다. 성장한 어른들이 자가용을 타고, 혹은 도보로 삼삼오오 찾아와서는 교회 안으로 들어간다. 교회 입구에는 7,8명의 담당자들이 있어 [주일예배] 참배자들을 애교스럽게 맞이하고 있었다.

 

 허동규(Х)씨와 함께 박창룡(ף, 75)장로를 만나러 갔지만, 예배 전의 회의 중이었기 때문에 인사만 나누었다. 박장로와는 작년(1996) 1027일 상애교회를 방문했을 때, 용호농장의 역사에 관해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어 친한 사이였다. 이날도 미리 필자가 오는 것을 알고 계셔서, 연구를 위해 쓰라면서 대한기독교장로회 상애교회편 {상애교회 80년사}(1989년 발행, 357)를 증정해 주셨다. [걷다 보면 자료가 제 발로 찾아오는 법이로군]라고 카와세()씨가 말했다.

 ()씨의 안내로 정착촌 용호농장을 둘러본다. 마을의 [본도(Գ)] 옆에 용호병원이 서 있다. 19753월에 개원()될 때까지는 [국립나병원 용호분원]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병원 내에 들어서면 수부에 [진료시간·오전9시부터 오후6시까지]라고 게시되어 있다. 당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휴진 중이었다. 인접해서 철근 콘크리트 2층 건물인 용호농장 농업협동조합의 사무소가 위치한다.

 

 오전 11, 교회당에는 삼백수십명의 신자들이 모여 [주일예배]가 시작되었다. 교회당 안에는 1층과 2층에 교인들의 좌석이 있고, 1층 정면제단의 좌측에 교회임원들이, 그리고 오른쪽에 36명의 젊은 남녀로 구성된 성가대가 나란히 서 있다. 성가대 속에 허동규씨의 모습도 있었다. 교회당에 모인 교인들 중, 한센병 회복자 노인들은 2할 정도로, 대부분은 청년이나 중년층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모두가 한센병 회복자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자식이나 손자들일까? 교회당의 밖에서는 어린아이들의 환성이 들려 온다.

 

 충청남도 대전시 교외의 정착촌인 충청농원의 [주일예배]에 참가했을 때도, 상애교회와 마찬가지로 노인들은 2할 정도로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 점에서는 전라남도 소록도나 대구 애락원() [주일예배]는 분위기가 달라서 한센병 회복자의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나가시마() 애생원, 오쿠() 광명원, 타마(ؤ) 전생원과 같은 일본의 한센병요양소의 경우, 요양소 직원 이외의 젊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며, 어린이들의 환성을 듣는다는 것은 전무()에 가깝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목사님은 신약성서의 이야기를 표정() 풍부하게 이야기하고 있었고,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 부르는 찬미가의 멜로디도 들어 익숙한 것들이 대부분으로, 한시간 정도의 예배는 이교도(무교도)인 필자에게도 충분히 즐거웠다. 옆에 앉은 할아버지는 한글로 쓰여진 성서와 찬송가를 부족한 손가락으로 넘기면서, 열심히 해당 개소를 필자에게 가르쳐 준다.

 예배가 끝날 무렵이 되자, 한국의 전통적인 의복인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성과 정장한 남성이 모두들 앞에 나와 섰다. 목사님이 최근에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이 젊은 커플이 사이좋게 마이크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모두로부터 축복 받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다. 예배의 행사가 끝나고 신자들은 산회(ߤ)한다.

 교회당의 출구에는 목사님이 서서 신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축복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필자가 교회당을 나가려 하자 [일본 분이시군요]라고 하면서 웃는 얼굴로 악수를 해 주셨다.

 

 마이크로버스 등 몇 대의 차에 분승하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돌아갔다. 그러나 10여명의 할머니들은 교회당의 앞의 돌계단에 걸터앉아 즐거운 듯이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허동규씨에게 [저 할머니들의 사진을 찍어도 괜찮을까요]라고 물으니, [괜찮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에, 가까이 가서 그 모습을 몇 장의 필름에 담았다.

 

 부산나병원은 1909년에 어빈(Ervin)이 창설하고 1912년에 멕킨지(Mackenzie)가 그것을 이어 받았다. 1916년에 측도()하여 1919년에 수정측도()한 부산(ݼߣ)1만분의1 지형도를 살펴보면, 당시의 동래군 서면 감만리 해변에 [나병원]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정서()쪽 대안()에 초량역이 있으니 현재의 부산외국어대학교 부근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장소로부터 부산항의 군사시설이 한 눈에 보인다는 이유로, 19351월 맥켄지는 국제스파이 혐의를 받아 [요새지대법 위반]에 의해 부산검사국에서 조사를 받고({조선 중앙일보} 1935117일부), 동년 2월에는 공판에 회부된다({동지()} 193525일부).

 더욱이 조선총독부는 19406월에 [부산나병원이전]에 관한 실시를 강요하여, 런던의 나병구료회(ϭ)에 이를 통지하고 회답을 요구하고 있다({동아일보} 1940626일부).

 조선총독부는 19413월에 부산나병원을 강제폐쇄하고 군용지로 접수하게 되며, 맥켄지는 귀국한다. 이리하여 여기에 수용되었던 7백여명의 한센병환자들은 생활의 기반을 잃고 조선각지에 흩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전전()의 서면 감만리에 있었던 [()병원]으로부터 남동쪽 6 지점에 용호동이 위치하며, 이 땅에서 조선 각지로 흩어졌던 한센병환자들이 [재회]한 것은, 일본통치로부터 해방된 다음해인 19463월이었다. 전쟁말기에 일본군의 시설이 있었던 용호동에 약 30명의 선발대가 들어가서 토지를 지키고 있었지만, 다음달인 410일에 280명의 한센병환자들이 들어가 [나촌()]을 만들었다. 당시의 280명중 현재 23명이 생존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은 박창룡(ף)장로를 포함한 15명이다. 현재 용호농장에는 약 1,500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19961027, 박창룡 장로의 증언).

 국유지와 농작지를 합쳐 13,000여평의 토지에, 옛날에는 닭장과 함께 변변치 못한 집들이 마주보고 서 있었으나, 현재는 낡은 가옥의 일부가 남아있긴 하지만, 신축가옥들이 잇달아 세워지고 있다.

 일제시대인 19354월에 제정된 [조선나예방령]은 해방 이후에도 존속되었으나, 한국에서는 19541월의 제18회 국회에서 그 폐기가 결의됨으로서 [전염병예방법] 가운데서 한센병은 일반전염병으로서 위치를 부여받게 되었다. 월간 {한성()}지에 19863월부터 902월까지 연재된 [정착농원순례]에는, 용호농장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19487월에는 경남도립 나요양소로 개칭, 재개()되어, 그 후 19587월에 다시 상애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5.16 군사쿠테타 직후인 19611, 이 상애원이 국립용호병원에 이관되면서 환자의 치료에 중점이 놓여지게 되었기 때문에 많은 환자가 재활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정착사업이 성공적인 사업으로서 평가되는 가운데 1975331, 정부는 용호병원을 폐원하고 한센병으로부터 치유된 사람들만이 현지에 정착할 수 있도록 했다(키쿠치 요시히로()번역 {등불의 마을한국 한센병회복자 정착촌} 199410, p.111).

 

 용호농장에는 현재 공장들이 진출하고 있으며, 대도시 부산의 근교인 관계로 도시화의 물결이 밀려와 여러 가지 새로운 과제를 안은 채 주민들의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용호농장에서 부산시로 돌아왔다. 지하철 [남포동]역에서 하차하여 생선을 파는 아줌마와 할머니들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지는 자갈치시장을 걸으면서 필자는 깊은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일본에서는 왜 1990년대가 될 때까지, 강제격리를 전제로 한 [()예방법]이 방치되고 있었으며, 한센병 문제가 일반사회인들의 뇌리로부터 완전히 사라져 버렸던 것일까 라고.